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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전쟁영웅과 최고의 명장
동서고금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을 든다면 발칸 반도로부터 페르시아,인도에 이르기 까지 대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 알랙산더 대왕, 중국을 공략하고 중동과 동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대의 제국을 세운 징기스칸,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명언을 남기며 유럽을 석권한 나폴레옹 세사람이 아닌가 한다.
무인 출신으로 전장을 누비며 점령한 광대한 영토위에 제국을 건설하여 최고 통치권자인 대왕,칸, 황제에 오른 이들 세 사람과 달리 군인으로써 최고 영예인 명장이란 진정한 전쟁 영웅으로 전쟁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장군들이 적지 않다.
고구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구한 강감찬, 백전백승 해전으로 조선을 수호한 성웅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이다.
외국으로 눈을 돌리면 지중해를 종횡무진한 카르타고의 한니발, 중국 천하 패권을 두고 다툰 초한쟁패의 명장 한신부터 가까이는 2차대전 당시 명성을 떨친 독일의 롬멜, 영국의 몽고메리,미국의 패튼, 맥아더등이 내로라 하는 전쟁 승부사 명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군사강국 프랑스,미국,중국을 물리친 베트남 독립,통일,안보 영웅 지압장군이들 고대,서구권 명장들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동양권 명장으로 지난 10월 4일 102세의 나이로 별세한 베트남 전쟁 영웅 보 응웬 지압(武元甲) 장군이 있다.
공산권 국가 가운데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전쟁 천재 소련 초대 육군 원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장군에 이어 두 번째로 붉은 나폴레옹 칭호를 받은 지압 장군은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힌다.
장군은 1911년 8월 쾅빈성 안싸의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지압장군은 14살 무렵부터 당시 베트남을 통치하던 프랑스제국 반대 학생 운동에 뛰어들 만큼 애국심에 불타는 열혈 청년이었다. 하노이 대학에 들어가서는 군사학과는 거리가 먼 정치경제학과 법학을 전공하였다.
이처럼 지압장군은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평소 프랑스 역사등 사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손자, 알렉산더 등 동서양 명장들의 병법과 용병술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지압장군이 무장독립투쟁에 본격 가담하게 된 것은 반 프랑스 제국주의 운동울 주동한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난 후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 1929년 중국 남부로 건너갔다가 망명중이던 호치민을 만나면서였다.
중국에 머무르며 게릴라전에 바탕한 마오쩌둥의 혁명론을 토대로 독립투쟁방안을 강구하던 사이 부친과 아내, 여동생은 프랑스 식민 당국에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하다 끝내 처형당했다고 한다.
중국으로 건너간지 2년후인 1941년에 귀국한 지압장군은 베트남 북부 농촌지역에 머무르며 베트남 독립 연맹 산하 군대인 베트민군 창군을 주도했다.
“내 사전에 항복이란 없다”는 명언을 남긴 지압장군이 명장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막강 프랑스군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였다. 당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밀려났던 프랑스 군이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옛 식민지였던 베트남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 돌아오자 일전이 불가피해졌다.
프랑스는 식민 통치의 최대 걸림돌인 호치민의 독립연맹 베트남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1953년 북부 최전선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 1만 5천여명의 병력과 최신 전차와 야포를 배치하고 공중지원이 가능토록 활주로까지 건설하는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 장군이 완전무결 전투준비태세를 호언하며 베트민군을 얕잡아 보고 방심하던 사이 지압장군은 105미리 야포 200문을 동원된 지원인력의 몸에 밧줄로 묶어 쥐새끼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하루 800미터씩 은밀하게 프랑스군 사거리 내로 이동시킨후 기습공격을 가했다.
200여문의 곡사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고 날려보낸 포탄에 지리멸렬한 프랑스군은 전투다운 전투한번 치르지도 못한채 프랑스 전쟁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55일간의 전투에서 3000명이 전사하고 12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계기로 식민지배를 포기 하고 철군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군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지압장군의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신출귀몰한 3불 전략은 미국을 상대로한 베트남 통일전쟁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프랑스군의 철군 후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북부 베트남 호치민 군이 남북 통일을 위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자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 아이젠아워, 케네디 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을 강화하였다.
남북통일의 최대 걸림돌로 등장한 미군과의 일전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비록 프랑스군은 격퇴하였다고는 하나 세계 최강의 최첨단 군사력을 자랑하는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면전은 승산이 거의 없는 것으로 군사전략가들은 판단하였다.
그러나 지압장군은 이러한 평가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골리앗 미국과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펼쳤다. 지압장군은 1968년 1월 30일 8만명의 북베트남 정규군을 동원하여 남베트남 전역에서 대대적인 구정 대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때 지압장군은 남부 국경도시 케산에 2만명의 병력을 투입 기만적 공세활동으로 미군의 관심을 집중시켜 놓은 후 남베트남 주요 도시 관공서를 기습 공격하였다. 당시 구정 대공세 작전시 작전에 투입된 8만명의 병력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만여명이 전사하는 등 북부 베트남 군의 손실도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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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공 미국 대사관이 일시 점령 당하는 장면이 TV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되면서 반전여론을 불러 일으켜 베트남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파리 평화회담을 이끌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정 대공세로 미국 타임지로부터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찬사를 받은 지압장군은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 통일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통일전쟁 승리 4년주인 1979년 3월 중국이 20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침공하였을 때도 지압장군은 불과 10만명의 지역 예비군으로 정면 대결을 펼쳐 끝내 중국군을 물리쳤다.
중국군은 3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철수함으로써 무릎을 꿇은 것이다. 중국과의 전쟁을 끝으로 지압장군은 1980년 국방장관,부총리 직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돌아갔다.
지압장군은 군사적 강대국인 프랑스, 미국, 중국을 격파한 불세출의 명장이자 베트남의 독립, 통일 영웅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 지압장군은 102세의 천수를 누리고 10월12일 국장을 거쳐 그의 고향인 쾅빈성에 안장됨으로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군사주권 포기한 무소신,무책임 정치군인 한국의 리빠똥 장군들
호치민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베트남군의 전쟁영웅 지압장군을 보면서 과연 우리 국군에도 지압장군 같은 뛰어난 군사 전략과 용병술 민족적 애국심을 갖춘 구국적 참군인이 있는지 되돌아 보게 된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남북간에 벌어진 비극적 동족상잔인 6.25 전쟁에서 결코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도 않은 전공을 놓고 명장타령을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디 이뿐인가.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군을 권력욕의 도구로 악용하여 군사쿠데타, 국민 학살등 초법적 잔학무도한 반역적 범죄를 통한 정권 강탈과 반민족적 독재 정치로 국민과 나라를 고통속으로 빠뜨리는 정치군인으로 전락하였다.
반역적 역주행으로 민주주의를 퇴행시킨 이명박 정권과 유신독재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박근혜 정권하의 군수뇌부 또한 순종형 정치군인이란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천안함, 연평도 안보국난을 자초한 무기력 무능력 무책임 안보장사로 패권적 기득권을 누리는 사이비 안보 장사꾼들의 전작권 재연기 타령에 영합하여 군사주권을 포기하는 혼과 군인정신이 실종된 무소신 꼭두각시 리빠똥 장군들 일색이다.
이들에게 국가 안보와 국민의 생존, 재산 보호등 안전을 의지해야 하는 현실에 국민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언제쯤 우리에게도 프랑스 미국 중국 등 군사 강국에 당당히 맞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국민의 안전을 지켜낸 영원한 군인, 백전백승의 전쟁영웅 20세기 최고의 명장 지압장군같은 태산 같은 장중한 참 군인 명장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