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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천황으로 시작되는 서기전660년 이전의 일본열도의 역사는 바로 단군한국의 역사로 소위 일본의 신대역사(神代歷史)가 되며, 소위 신무천황(神武天皇)의 뿌리는 단군한국의 두지주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의 후손이고, 이후 일본천황가를 장악하게 되는 가야와 백제, 그리고 신라, 고구려, 대진국(발해)와 관계 속에서 이어진 역사가 된다.
[한단고기]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2173년 단군한국 "제 3대 가륵 단군임금 무신 10년에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베게 하였다. 이 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소의 머리라는 말임. 이두식 표기)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 소머리 나라.)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일본 본토인 세섬을 말함)에 웅거하며 천왕을 칭했다."
천왕이란 당시 오로지 단군3한국을 다스리던 진한국의 단군임금만이 칭할 수 있는 칭호로써 열도로 이주하여 천왕을 칭한 협야라는 자는 반란을 도모하다 진압당한 예읍 추장 소시모리의 후손이였으니, 소시모리(소씨족의 우두머리)은 DNA자체가 우두머리나 왕이 아니면 만족을 못하는 반란의 피가 흐르는 족속이 아닌가 싶다. 그래셔 단군한국의 직접 통치가 크게 미치지 못한 열도로 도망가서 마음껏 왕노릇을 했나 보다.
또 [환단고기]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723년 "단군조선 제 35대 사벌 단군임금 무오 50년에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合)을 보내 바다의 웅습(일본 큐슈지방의 웅본성)을 평정하였다......, 서기전 667년 단군조선 제 36대 매륵 단군임금 갑인 38년에 협야후(陜野候 소시모리 후손) 배반명(裵憹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고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라고 적고, [환단고기]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편에, "갑진년(서기전 677년)에 아들 궁홀(마한 즉 마조선의 단군)이 즉위하더니 갑인년(서기전 667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바다의 섬)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환단고기]대진국본기에, "옛날에 열도에는 이국(伊國)이 있었고 역시 이세(伊勢)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고, 이도국(伊都國)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日向國)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安羅)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고구려 홀본)사람이다....안라는 뒤에 임나(任那대마도)에 들어 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왜인들은 갈리어서 산과 섬에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제일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다던 곳이다....이도국은 곧 반여언(盤余彦. 신일본반여언존 즉 신무천왕을 말함)의 옛 읍이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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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왕가의 뿌리 조상은 단군한국의 두지주 예읍 추장 소시모리(소씨족 우두머리=추장)
[환단고기]기록대로 서기전2173년에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예국(濊國)의 제후였던 여수기(余守己)가 진압하고 소시모리를 베었다. 여수기는 단군한국 초기 인물로 예국에 봉해졌다.
이후 소시모리의 땅을 소시모리(素尸牟犁)로 하다가 한자로 우수국(牛首國)이라 칭하게 되었다. 우수국의 우수는 곧 소머리로서 소시모리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 된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국상입존(國常立尊)의 15대 조상이 되는 천지어중주존(天之御中主尊)은 예읍 추장 소시모리 이후 우수국(牛首國)이라는 나라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 된다.
그러면 일본 천황가의 뿌리가 되는 하늘로써의 <고천원>이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위치는 어디일까? 두지의 두(豆)가 콩과 관련된 말이 되어 만주에 위치한 것이 되고, 예(濊)는 단군한국의 백두산(白頭山) 동쪽에 위치하므로, 두지주 예읍은 청나라의 시조가 되는 누루하치의 선조들이 살았던 지금의 두만강 유역이 된다. 소시모리의 땅이 후대에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하고, 강원도 춘천(春川)이 이전에는 우수국(牛首國)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단군한국의 예(濊)에 속했던 소시모리의 후손들이 남하하여 한반도의 동해 땅에 살다가, 이후 국상입존(國常立尊)이 바다를 건너 일본 땅에 정착하게 되는 것이 된다.
일본에 소모리데라(소머리 절:牛頭寺/절=저르=더르=데라)라는 절이 있어 소와 관련된 것이 있으니, 우두사를 세운 주인공들은 소모리족이 분명한 것이다.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선대에 우두천황(牛頭天皇)이 있으니 아마도 단군한국의 추장 소시모리다.
우두천황은 큰 죄 지은 자들을 죽이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군한국에 반역하다 참수를 당한 소시모리의 교훈을 되새겨 후손들이 소시모리를 우두천황이라 받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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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신이라는 천조대신은 소시모리 후손들이 열도에 정착한 땅을 단군한국의 예읍 추장 소시모리의 직함을 그대로 승계하여 다스렸다는 의미가 된다.천조대신(天照大神)을 국조신(國祖神)이라 칭하는 이유가 된다.
천조대신을 제사하는 이세신궁에 소장되어 있는 원시 한글은 바로 3대 갸륵 단군임금 때 삼보 을랑에게 명하여 제작하게 한 한글의 원형문자인 가림토 문자가 되는 것이다.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킨 시기가 가림토가 제작된 3대 갸륵 단군임금 시기이니 소시모리과 후손들이 사용했을 가림토 문자가 소시모리의 후손이 되는 천조대신 제사하는 이세신궁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글의 원형이 단군한국의 가림토 문자임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고, 사실을 기록한 [환단고기]기록내용의 진실성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고고학적 사료가 된다.
일본 신무천황의 뿌리나라 이도국을 다스린 국조신 천조대신은 "두디도리(豆只都利:豆只公)"라 적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도리는 우두머리로서 촌장(村長) 또는 추장(酋長)의 뜻인 것이다.
일본의 이세신궁에 소장되어 있는 가림토 문자을 보면, 이세신궁의 주인공인 천조대신은 단군한국 두지주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드러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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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본의 역사는 3대 갸륵 단군임금 시기인 서기전 2173년 단군한국의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이던 소시모리(素尸牟犁)에서 시작한다. 약 1,000년이 지난 후 소시모리의 후손들이 서기전 1100년경 이전에 한반도 동해 춘천(春川)에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되고, 다시 남하하여 서기전1100년경에 국상입존(國常立尊)을 비롯한 후손들이 마한 땅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국상입존이 일본 땅에 출입하여 고천원(高天原)과 아시하라(葦原) 등의 지명을 남긴 것이 된다.
서기전850년경에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고천원(高天原)을 떠나 풍위원(豊葦原:토요아시하라)에 정착한 것이 되는데, 고천원은 소시모리의 후손들이 한반도에 자리잡았던 땅으로서 일본 땅에 그대로 대입된 것이며, 아시하라(葦原)는 "아시벌"로서 "아침 땅"이라는 말이고 천조대신이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이세(伊勢)이다. 이세(伊勢)라는 말도 아침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호의 기원이 되는 일향국(日向國)이라 불리우는 이도국이 바로 소시모리 후손들이 정착하여 세운 나라가 되고 그 1대 우두머리가 한반도 마한국 단군의 통치하에 있던 천조대신이라는 의미다.
[환단고기]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편에, "갑진년(서기전 677년)에 아들 궁홀(마한 즉 마조선의 단군)이 즉위하더니 갑인년(서기전 667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바다의 섬)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환단고기]기록에 소시모리의 후손이 되는 협야 신무천황이 등장하게 되는 서기전 667년 단군조선 제 36대 매륵 단군임금 갑인 38년에 협야후(陜野候 소시모리 후손) 배반명(裵憹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고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갸륵 3대 단군임금 시기의 기록에 "그(소시모리)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일본 본토인 세섬을 말함)에 웅거하며 천왕을 칭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무가 서기전660년에 천황을 참칭하기 전에는 그 형이 되는 배반명이 단군조선 마한(馬韓)의 제후였던 협야후(陜野侯)였으며, 배반명의 아버지가 되는 언파불합(彦波不合)은 단군조선 마한의 한 장수였고, 그 선대는 대대로 일본 천황가의 하늘인 고천원이 되는 두만강 지역의 단군한국두지주 예읍의 추장 직을 이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천왕을 칭한 신무천왕의 실체는 누구인가? 협야노(陜野奴)라는 해석이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마한의 협야땅의 제후가 배반명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배반명(도반명)과 신무천황을 따로 적고 있으므로 배반명이 도반명이라고 보여지므로 배반명과 신무천황은 다른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따라서 마한 단군의 명령을 받은 협야후 배반명은 열도에서 천왕을 칭한 자가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신무는 누구인가? 바로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면 일향국이라는 [이도국]을 근거지로 삼은 마한의 협야인임을 알 수 있다.
소시모리 후손들로서 [일본서기]의 언파000000불합존이 [환단고기]의 언파불합이고, 도반명이 마한의 협야후 배반명이 되며, 일향국을 다스린 신일본반여언존이 협야노가 된다. 도반명은 배반명의 이두식 표기인데 도는 벼도이므로 배와 같은 소리이고 반은 둘 다 같은 소리이며 명(命)은 일본말로 미꼬또인데 존(尊)보다는 낮은 존칭이다.
그래서 언파불합은 단군조선의 마한 장군으로서 서기전 723년에 명을 받아 웅습을 평정한 사람이고, 협야후 배반명은 서기전 667년에 단군조선, 마한의 명을 받아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삼도(일본)의 반란(도적이라 적음)을 12월에 완전히 평정한 사람이며, 협야노는 형인 협야후 배반명을 따라 왔다가 서기전 660년에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즉 소위 혁명을 일으켜 천왕을 참칭한 일본천황가 족보에서 열도를 평정한 1대 천황에 해당하는 신무천황(神武天皇)을 의미한다.
[환단고기]에서 협야노로 적은 이유는 반역자이므로 그리 적은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일본서기]에서 신무천황의 어릴 때 이름이 협야라 하여 협야존이라 한다라고 적고 있는데, 소시모리의 후손인 협야후 배반명의 무리임이 틀림없으며 만약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협야후 배반명이 삼도를 평정한 후에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천왕을 참칭한 것이라면, 배반명이 바로 신무천황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도반명과 신무천황을 따로 적고 있으므로 배반명이 도반명이라고 보여지므로 배반명과 신무천황은 다른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