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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얼마나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문자입니까. 작가 이정명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세종의 한글창제 과정에서 있었던 반대파들의 저항, 그리고 음모론을 다뤘던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어느정도 동감할 수 있었던 어려움들이 한글 창제 과정에서 있었을 것이란 짐작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새로운 문자의 창제가 단순히 문자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충돌이기도 했을 것이고,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안티테제의 상징 정기준(가리온)은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자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 기득권들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 될 것인가를 두려워합니다.
말이 글자가 되어, 그것이 공유되고 회람되는 것, 바로 그것이 문자가 가진 '파괴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는 바로 기록이 되어 역사의 바탕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 체계에 대해, 혹은 고대 중국의 역사를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문자들이 지배자들에게 봉사했다면, 한글은 그 시작부터 평범한 민초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목적이 뚜렷했던 문자입니다. 이는 초기 조선의 지배 이념이 나중에는 변질됐을지언정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와 비슷했던 점들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입니다.
언어가 생명을 얻는 과정에서 문자를 통한 의미들의 전파와 나눔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 인터넷이라는 이기를 통해서 우리는 글을 전파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그 안에서 '작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부작용'이라는 것들이 있고, 그것이 어떤 폐해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억지로 규제한다는 것은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의 문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 567돌 한글날 경축식의 경축사에서, 정홍원 국무총리가 말한 내용 중 "청소년의 비속어 사용, 언어폭력 등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대해 범 국민적 언어순화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 부분에서, 거기에 동감한다기보다는 이것이 바로 유신시대가 다시 도래한다는 것의 재판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던 것이 저 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언어폭력, 무분별한 비속어와 저속어, 당연히 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네티즌들의 자정작용에 맡겨 두면 될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청소년들의 언어'라는 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바로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은 광장입니다. 과거의 장터나 저잣거리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범 국민적 언어순화'라는 말에서 '인터넷에 개입할 핑계를 찾는 관권'이라는 그림이 보이는 것은 유독 저 뿐만일까요?
과거 독재정권 시대에 '자발적인 참여'를 부탁하는 것이 어디 그리 이뤄졌었는지요? 그것은 자발성이라는 가면을 쓴 '동원'이었고, 제 기억엔 이런 것들이 '범 국민 ** 대회'라던지, 혹은 '궐기대회' 따위의 그림들로 바로 연상작용이 이뤄지는군요.
글은 단지 소리를 표기하는 도구가 아니라 문화를 담는 도구이기에 그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한 생각들을 담아 둬야 합니다. 그러나 버젓이 그런 대원칙을 어기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다양한 문화 현상들에 대해 자기 입맛에만 맞는 것들을 우대하고, 자기들의 잘못된 것을 짚어내는 기록들엔 전혀 똘레랑스를 보이지 않고 있는 권력이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솔직히 자가당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군요.
정 총리의 말대로, 우리 말과 글의 주인은 바로 그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얼마만큼 믿고 신뢰하는가 하는 문제가 담보되지 않은 '범 국민적 언어순화 운동'이, 바로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뭔가 '다른 의도'를 관철하려는 시발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