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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일일사극 <수백향>은 백제 동성왕과 무녕왕의 혈통적 관계를 사촌관계로 잘 설정했다.
즉, 한성백제의 마지막왕으로 고구려 장수왕에게 참수당한 개로왕은 동성왕의 큰아버지이고, 왜의 군사적 지원을 위해 훗날 무녕왕을 임신한 개로왕의 왕비(형수)를 데리고 열도로 간 곤지는 동성왕의 친아버지이면서 무녕왕의 작은 아버지이자, 양아버지였다.
따라서 백제 동성왕과 무녕왕의 혈통적 관계는 사촌관계다.
아쉬운 점은 동성왕의 시해사건에 대한 배경이 백가 개인의 원한풀이로 그려진 점이고, 장소도 서백제 치소인 산동지역 거발성의 임류각으로 그려지지 않는 점이다.
동성왕이 서백제의 치소였던 산동지역의 거발성의 임류각에 오래 머물면서 본국 한반도 웅진 백제세력은 위기를 느끼게 된다. 혹시 동성왕이 백제의 황도를 산동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래서 웅진세력은 속히 본국 황도로 환국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돌아올 줄 모르고 임류각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던 동성대왕은 마침내 백가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동성왕의 시해사건은 백가를 중심으로 웅진세력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반란사건으로 형식적으로 무녕왕을 지지한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되야 할 것이다.
근초고왕 이래로 해양강국 대백제의 백제부흥을 실현한 동성왕이 산동지역 거발성에서 오래 머문 이유는 아마도 고구려와 북위의 공격으로부터 서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면서 중국대륙을 손에 넣기 위한 장기적 포석이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백제의 웅진세력은 그러한 동성왕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나머지 동성왕 시해라는 무리수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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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곤지.무녕왕.동성왕의 혈통관계는 <삼국사기>기록내용보다는 백제인들이 기록한 <일본서기> <백제신찬>사료내용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성왕이 참수당한 기록내용이나 근초고왕이나 근구수왕의 죽음이 기록된 <삼국사기>기록내용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본다.
왜냐하면 성왕의 무덤은 열도에 존재하고 있고, 오사카의 응신천황릉의 주인이 바로 근초고왕에게 칠지도를 받은 인덕천황의 아버지로써 일본인들이 신공왕후와 함께 부부로 섬기는 근구수왕의 무덤일 확율이 높기 때문이다.
근초고왕 역시 담로지역이였던 열도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보는 것이 맞다할 것이다. 일본황실이 모시는 조상신들이 바로 온조.비류.구태.근초고왕.근구수왕.성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태용 박사의 분석이 정확히 맞다. 개로왕은 훗날 무녕왕을 임신한 왕비를 왕비를 사랑한 동생 곤지에게 맡기었고, 도중에 섬에서 낳았으니 서마(사마)라는 이름으로 지었고, 곤지가 오사카에서 양아들로 키웠음을 알 수 있으며, 오사카에서 곤지는 친아들을 낳으니 무녕왕의 사촌동생 동성왕이라 할 것이다.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이 죽자, 곤지는 친아들 동성왕을 백제왕으로 세웠고, 동성왕이 백가에게 시해당하자, 무녕왕이 늦은 나이에 왕위에 즉위했다할 것이다.
백제는 부여에서 나온 나라이기 때문에 형사취수제가 유지되었고,개로왕이 죽자, 개로왕의 왕비는 곤지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에 무녕왕의 친부는 개로왕이고, 양부는 곤지다.
아버지 개로왕이 죽었기 때문에 기반세력이 약했던 무녕왕이 곧바로 백제왕이 되지 못하고 곤지의 친아들 동성왕이 백제왕에 즉위하게 되었다할 것이다.
동성왕은 한성을 정벌하고 개로왕을 참수한 고구려 장수왕과 맞짱을 뜨면서 고구려가 차지한 서백제 지역을 회복하게 된다.그리고 고구려의 제후국가였던 북위와 벌인 10년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 동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동성왕이 서백제의 치소였던 산동지역의 거발성의 임류각에 오래 머물면서 본국 한반도 백제세력은 위기를 느끼게 된다. 혹시 백제의 황도를 산동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이다. 웅진세력은 속히 환국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돌아올 줄 모르고 임류각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던 동성대왕은 마침내 백가에게 암살당하고 만다.아마도 동성왕의 시해사건은 백가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반란사건으로 형식적으로 무녕왕을 지지한 정치세력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이후 백제왕과 호족세력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내분이 이를 입증한다.그리고 그것이 백제멸망의 근원이 되었다고 본다.
나라의 내분은 외부의 침략이전에 자멸의 길이기 때문이다. 동성왕이 시해당하자, 서백제 지역의 백제 태수들은 고구려로 투항함으로써 고구려 문자명왕 시기에 다시 서백제가 폐지되는 정세변화가 발생한다.
이후 수.당이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백제는 서백제를 상실하고 한반도 서남해 지역과 왜국을 분국으로 둔 동백제인 열도로 영역이 축소되게 되면서 남한지역의 패권을 놓고 당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하면서 대야성 전투에서 사위 김품석과 딸이 백제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백제정벌에 정치생명을 걸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신라와 끊임없이 싸우는 상황으로 바뀐다.
무왕과 의자왕 시기에 신라를 완전히 제압했으나, 의자왕의 자만과 백제.고구려의 권력내분으로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그러나, 백제의 이름은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나, 다시 동백제 열도에서 일본이라는 국호로 새롭게 태어나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다.
따라서 국가혼란과 분열을 부추기며 주변국가들을 이롭게 하는 반국가 이적세력에 대해 단호하게 척결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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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백제중흥을 실현한 동성왕(동생)과 무녕왕(형)은 사촌관계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유태용박사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25대왕인 무녕왕은 휘가 사마로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그는 신장이 8척이나 되며, 미목이 그림과 같고 인자관후하여 백성이 순종하였는데, 동성왕이 재위 23년에 좌평 백가의 모반으로 시해 당하시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무녕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일본서기>와 이 책에 인용된 <백제신찬>이라는 사서에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쓰여 있다.
<일본서기> 무열왕 4년 4월조에 "이 해에 백제의 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자 나라 사람들이 죽이고 시마왕을 세웠는데 이가 무녕왕이다"라고 하면서 백제의 역사서인 백제신찬의 기록을 옮겨놓고 있다.
<백제신찬>에는 "동성왕이 무도하여 포악한 짓을 하자 나라 사람들이 제거하고 무녕왕을 세웠다. 휘는 사마왕인데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다.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그래서 이름을 시마로 지었는데, 지금도 각라 가운데의 섬을 시마로 부른다"라고 하면서도 탄생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지금 생각하니 시마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다. 이를 배다른 형이라 하는데 잘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의혹의 기사를 남기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건지, 아니면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다행이 일본서기 웅략왕 5년 4월조에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기사가 있어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즉,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침략의 어려움에 처하자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아우인 곤지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이 때의 사실이 <일본서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개로왕이 곤지에게 사신파견을 명하자 곤지는 "상군의 명에 어긋날 수는 없습니다. 원컨대 군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후에 나를 보내 주십시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장가들여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부디 같은 배에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나라로 돌려 보내도록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곤지가 일본으로 출발하였는데, 두 달 후인 6월에 이르러 개로왕의 말대로 축자의 각라도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시마왕이라하였다. 그래서 곤지는 배 한척을 마련하여 시마왕을 그 어머니와 같이 백제로 귀국시켰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이러한 기사에 의심을 품고 무시해 왔다. 그것은 <일본서기>가 근본적으로 한일관계를 일왕중심으로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71년에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지석이 나왔는데, 거기에 백제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이며, 523년 5월 7일에 62세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망년도를 역산하면 출생년도가 되는데, 왕이 62세로 사망했다고 했으므로 왕이 출생한 해는 461년이 된다. 이는 일본서기의 백제신찬에 곤지가 일본으로 파견된 신축년 즉 461년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신찬>의 기록을 신용한다면 무녕왕의 아버지는 삼국사기에서 말한 동성왕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게다가 개로왕의 아우인 곤지도 단지 의부일뿐 무녕왕의 생부는 역시 개로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녕왕의 아버지가 동성왕이냐, 곤지냐, 개로왕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서는 왜 무녕왕의 아버지를 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의 역사관에서 찾아야 될 것 갔다. 김부식은 철저한 유교 학자로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유교적 윤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엉뚱하게도 동성왕을 끌어 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고구려의 침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훗날 무녕왕이 되는 사마를 임신한 왕후를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에게 맡기면서 일본으로 구원요청을 떠나는 곤지의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개로왕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헛되이 왕도 한성은 고구려군에 함락되고,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포로로 아차산에 끌려 가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우리는 무녕왕 출생의 미스테리를 통하여 당시 백제가 얼마나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당시 백제왕실은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했었는가를 새삼 되돌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