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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일 나가기 전에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안부나누기 하는데, 어디 멀리 사는 친구의 말은 이랬습니다. "난 오늘부터 휴가야." 응? 갑작스레 뭔 휴가? 그 친구는 연방공무원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연방정부 셧다운이잖아. 졸지에 휴가야. 그것도 무급."
아... 그랬지. 저도 비록 '우체부'지만 똑같은 연방정부 공무원입니다. 그래도 저는 정부 셧다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아마 별 생각없이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연방우정국은 세금에서 지원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체국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철저히 '매상'으로 운영됩니다. 우편물과 소포가 우리의 밥줄인 겁니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좀 힘들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게 그냥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 정도 지속된다면 모르거니와, 만일 이게 한 달, 아니 두어 주만 계속되도 당장 미국엔 차질이 생길 게 분명합니다. 일단 미국민들은 국립공원 이용도 어려워지고, 조난을 당해도 레인저들이 출동하지 못해 그냥 속수무책이 될 거고, 연방도서관 같은 곳을 이용 못해서 오는 피해도 있을 것이고, 여권을 발급받는다던지 하는 것도 생판 어려운 일이 될 거고... 생각보다 연방정부의 입김이 미치는 곳은 많습니다. 연방 농무국 같은 곳이 만만하게 셧다운 당할 것이고... 쇠고기 도축 검사 같은 것이 형식적이긴 해도 꼭 필요한 것인데, 아마 가장 먼저 만만한 중단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문제는 이들 연방정부 직원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는 것인데, 이들이 보름 이상 봉급을 지급받지 못할 경우, 이 사태가 빨리 끝난다면 내야 할 고지서에 할증료 붙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생각보다 이게 길게 간다면 미국 내수 경기 자체에까지도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될 겁니다. 그나마 지금까지 오바마 정부가 어느정도 억지로라도 만들어 놓았던 경기가 그나마 무너지는 단초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이 지금까지 역시 '억지로' 떠받쳐 온 주택경기 같은 것들에 모두 영향을 끼치게 되겠지요.
이른바 오바마 케어를 둘러싼 공방이 정치적 자존심 싸움, 치킨게임이 되더니 결국 이같은 사태를 초래하게 됐습니다. 미국의 회계연도는 10월 1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전에 예산안이 타결되어야만 각 부처들이 예산을 배정받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월 1일이 됐어도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이 오바마 케어에 관한 예산을 아예 배제하고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려는 인종주의적인 편견도 적잖게 작용했다고 봐야겠지요.
미국에서 하려는 오바마케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체제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미국의 의료보험체제는 이 나라가 과연 선진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들 정도로 열악합니다. 있는 사람에겐 참으로 관대하고, 없는 사람에겐 가혹한 제도입니다. 아주 저소득층 계층에게 지급되는 무상의료를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더 가난해지려고 하는, 참으로 기형적인 제도입니다. 이에 대해선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에 매우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부담은 부유한 계층이 지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들이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중산층의 붕괴를 가속화시키고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가속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이렇게 강짜를 부릴 수 있는 이유는 일단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것이 한 원인입니다. 공화당 장악 지역은 대부분 미국의 보수적 농촌 지역들입니다. 총기 문제, 종교 문제, 동성애, 낙태 문제 등 미국이 첨예하게 갈등하는 부분에 있어서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지역들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 지역들에선 '감히 깜둥이가...' 하는 식의 정서가 있는 겁니다.
오바마를 보고 있으면 자꾸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겹쳐보입니다. 마이너 출신의 대통령, 기존의 길을 밟지 않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이기를 통해 집권의 길을 연 대통령, 그리고 뭘 하려고 해도 상대의 발목잡기에 흔들려야 하는 대통령... 심지어는 자기 당 안에서도 밟히고 씹히고, 전 국민이 대통령 때리기를 스포츠로 삼는, 그래서 언제나 외로이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대통령... 의회는 발목을 잡고, 자기 마음대로 뭘 할 수 없었던 대통령... 권력은 권력이되, 권력을 누리지 않는, 혹은 권력을 누릴 수 없는 대통령... 비록 세계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의 대통령일지언정 자기가 뜻한 바를 자기 맘대로 펼치는 것이 어려운 대통령... 그것이 지금 오바마가 처한 처지가 아닌가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서 출발했지만 그 기대를 채워주기는 커녕 실망시킨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가 지금의 사태에 굴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지켜주길 바라는 것은, 그나마 백인 수구 꼴통들이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보다는 민주당이 조금 더 전향적이라는 것 때문이고, 무엇보다 오바마가 가진 상징성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색인종도 미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인종의 벽을 뛰어넘은 지지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가, 선진국이라면 매우 당연한 전국민 의료보험을 만들어 이를 업적으로 만들어 내고, 더 나아가 남은 임기동안 보다 확고하게 자기 정치를 펼쳐갈 수 있다면, 아마 다음 선거에선 그에게 큰 지지가 쏟아질 겁니다.
다행히도 연방 하원은 매 2년마다 선거가 있고, 이번에 이 사태로 인해 공화당의 지지도도 적지 않게 떨어졌을테니까요. 어떻게 과반만 넘긴다고 해도 오바마에겐 기회가 생기는 셈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선거 때 손가락 잘못 놀려 국민이 고생하는 건 매일반인 모양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