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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수도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2000여 년 전 나무쪽 문서(목간)가 한군현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파장의 진원지는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장. 첫 발제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는 ‘새로 발견된 낙랑 목간’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최신 발굴 유물을 갈무리한 소개글을 발표했다.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이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학술지 <력사과학> 198~200호의 논문들을 통해 보고한 이 유물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뒤 60여 년 지난 시점에 나온 유일한 통계 사료다.
손영종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의 현별 호구 수를 적은 통계표라고 소개했다. 목간 목록, 사진, 수효, 서체, 판독 글자 전문 등은 언급이 없으나 낙랑군 남쪽 관할인 남부도위 7개 현, 동쪽 관할인 동부도위 7개 현, 중심부인 직할 11개 현의 일부 인구와 호구 수가 기록돼 있다.
목간 통계를 보면, 낙랑군의 핵심부인 조선현(평양)의 호구 수가 근 1만 호에 이르는 등 직할지 11개 현의 인구가 17만9천여 명, 남부도위 대방현 이하 7개 현이 5만1167명 등 모두 4만5956호에 28만여 명이 낙랑군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고조선 강역과 직결되는 낙랑의 강역 문제는 우리 고대사의 미묘한 쟁점이다. 낙랑군의 변천사 자체가 만주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킨 ‘동북공정’의 주요 연구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새로 공개된 낙랑 목간은 새삼스런 화두를 던져준 셈이다. 이미 인터넷 포털에서는 이 목간의 의미와 낙랑군의 위치를 둘러싸고 누리꾼과 아마추어 애호가, 재야 사학자들 사이에 다시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다. 낙랑 목간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평양 부근에서 다섯 차례 발굴됐다. 전모가 파악된 것은 일제시대 남정리 116호분 출토 목간뿐이며, 해방 뒤에는 90년대 <논어> 구절을 새긴 대나무 목간(죽간)들이 출토된 사실 정도가 알려 졌다.
북한 쪽은 왜 자기네 주장과 맞지 않는 목간 자료를 공개한 것일까?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영남대 사학과 권오중 교수는 “목간이 나온 장소를 우선 감안하지 않고, 거리가 먼 요서 쪽에 낙랑군 위치부터 비정하는 것은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제시대부터 사학자 이병도 등이 통설로 제기한 낙랑군의 한반도 주재설은 80년대 이후 거센 반론에 부딪혀왔다. 북한 학계와 재야 학자들은 평양에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이란 토착 독립 국가가 기원후까지 존속했다가 후한에 복속되었으며, 313년 고구려에 흡수됐다고 주장해왔다. 기원후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이의 딸 낙랑 공주와 결혼하면서 내통해 낙랑국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 이곳의 중국계 출토 유물들이 기원후 후한 계통이라는 것이 주된 근거였다. 이는 중국 왕조가 경영한 낙랑군은 요동벌의 요하 부근이나 더 서쪽인 요서 대릉하 일대에 있었다는 두 개 낙랑 병립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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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에서 출토된 기원전 45년 경의 낙랑군 인구조사 목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한나라와 1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승리했으나 결국 한나라와 전쟁하자는 파와 휴전하자는 파로 나누어 내분을 겪다가 결국 위만의 손자로 당시 위만조선의 왕이였던 우거가 살해당함으로 멸망한 위만조선의 지역은 북한의 평양지역이 아니라, 요하 서쪽으로 남으로는 산동지역에 이르는 요서지역이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군현 중에서 낙랑군은 북한 평양지역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러면 번조선 낙랑국 유민들이 세운 최씨 낙랑국이 존재했던 북한 평양에서 왜 낙랑군 인구조사 목간이 출토된 것인가? 그것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기록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즉 기원후 42년에 왕망의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한나라를 복원한 후한의 광무제가 수군을 이끌고 발해만을 건너 평양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살수이남지역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최씨 낙랑국은 호동왕자의 미남계를 통하여 낙랑공주가 북을 찢음으로써 고구려에 멸망한 번조선 유민국가다. 그러나 고구려에 곧바로 복속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랑국 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 났을 것이고, 부여와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고 북부지역에서 한군현을 지키던 후한은 고구려를 후미에서 공격할 필요가 있었는데, 최씨 낙랑국 유민들 역시 부흥운동에 필요한 군사동맹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살수(청천강)이남지역을 차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낙랑국 지역을 차지하고 낙랑군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한의 낙랑군 치소을 북한 평양지역으로 삼았기 때문에 요서지역의 낙랑군 관리들이 이주하면서 기원전 45년전에 해당하는 낙랑군의 인구조사 목간이 자연스럽게 출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구당서]에서 고구려의 장안성이 옛날 한나라의 낙랑군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참조자료:한사군 위치와 낙랑목간 http://blog.daum.net/hsg868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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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위대성은 한나라 군현들을 격파하면서 한나라루터 상실한 서토지역으로 진출했다는 점이다. 대무신왕 때 동부여 대소왕의 굴종요구를 물리치고 동부여를 정벌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만주지역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였고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통합하였으며, 태조왕 시기에는 선비.마한.예맥과 연합하여 현토군을 제외한 요서지역의 한군현을 철폐하고 번조선을 회복하여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하였으며, 미천왕 시기에는 북한 지역의 대방군과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내었다.
황해도 지역의 대방군은 후한이 쇠퇴하자 요동태수 공손강이 왕이라 칭하며 세운 나라다. 공손강은 후한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적했던 부여왕자 구태의 처남이다. 백제 책계왕은 대방군의 공주 보과을 백제왕비로 삼았다. 고구려 미천왕이 대방군을 공격하자, 백제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장인의 나라였기 때문에 군사지원을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패하여 대방땅은 고구려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초고왕 시기에 다시 대방땅 회복에 나서 고국원왕을 평양성에서 전사시키고 회복하였던 것이다.
선비족의 흥기로 고구려 영토가 요하 동쪽 만주로 국한되는 고구려 고국원왕은 고구려사에서 비참한 운명을 타고난 왕이였다. 모용선비족의 나라 연의 침략을 당하여 국내성이 유린되고, 미천왕의 무덤이 훼손되어 시신이 도굴되었고, 태후와 왕비가 고구려 백성 5만과 함께 인질로 끌려 가야 했다. 훗날 연나라 왕에 오르는 고운이 바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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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때 비로소 백제와 연나라에 대한 응징이 시작되는데,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요하를 건너 모용선비를 궤멸시키고, 모용선비 연나라의 개국시조 모용황의 사당이 있는 북경의 연군을 공격하여 사당을 파괴하고 유주지역까지 차지한 사실이 그것이다.
광개토태왕이 모용황 사당이 있는 북경 연군을 공격한 배경에는 모용선비족이 모용황 왕 시기에 고구려를 침략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도굴하고 국내성을 유린한 침략도발을 잊지 않고 그대로 응징한 것이다.
고구려의 최전성기는 광개토태왕 시기로 고추모가 꿈꾼 고토회복이라는 다물을 실현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광개토태왕 시기가 해동(고구려)의 강성기로 백제.신라.거란.왜가 조공을 하였고, 오늘날 감숙성에 해당하는 서량까지 평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숙성은 당시 모용선비족이 서진하여 세운 토욕이 있던 지역으로 광개토태왕비문에도 토욕정벌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학계가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탁발선비족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사]에도 광개토태왕이 토욕을 정벌한 해에 고구려인들이 54만이 북위 수도에 가득차자 북위가 수도를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인들을 대거 북위수도에 이주시킴으로써 북위를 완전히 제압하면서 초원을 장악했던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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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는 장수왕 때 왕족출신으로 왕비를 구걸하자, 귀족여인을 보내는데, 북위 선무제의 어머니가 된다. 선무제는 어머니를 위해서 고추모 사당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장수왕이 붕어하자 제후국의 예을 지켰으며, 선무제 시기에는 어머니의 혈족인 삼촌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니 고구려 제후국이나 다름없었다.
북위는 동성왕 시기에 백제와 10년간 전쟁을 벌이는데, 모두 패하고 말았으며, 한족화를 통하여 국가부흥을 꿰하게 된다. 고구려 문자왕 시기에는 백제 동성왕이 시해당하자, 중국 동해안 지역에 해당하는 백제군을 폐지하고 고구려에 통합시켰다.
그러나, 수.당이 중국대륙을 통일하자, 요하 동쪽과 서남해.열도지역으로 위축된 고구려와 백제는 위기를 느끼고 돌궐 등 초원세력.왜와 군사동맹을 맺었고, 고구려.백제의 틈바구니에서 홀로서기를 꿈꾸었던 신라는 제후국을 자처하는 저자세 사대외교로 당나라의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고구려.백제를 공멸시켰다.백제는 열도로 이주하여 다시 일본으로 태어 났고, 당나라와 군사적 합세로 고구려 계승국 대진국을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고 국경선이 임진강으로 정해짐으로써 신라영토는 남한지역에 그치게 되었다.
대진국은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증하면서 인구수가 감소하여 결국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으며 대진국 왕족은 고려로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