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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남3한을 통치하는 진왕이 거주하는 목지국이'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3세기 전반 당시 목지국은 마한연맹체의 주도세력이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인천·익산·예산 등의 여러 견해가 있으나, 충청남도 직산(稷山)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지국의 지배자는 진왕(辰王)이라 불렸고,
마한연맹체의 맹주일 뿐만 아니라 진한과 변한의 일부 소국들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자립하여 왕이 될 수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후대의 왕들처럼 그 지위가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마한연맹체가 어느 한 중심세력에 의해 일원적으로 지배되는 집권적 정치구조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진왕의 정치권력은 물적 기반의 상대적 우위나 중국 군현과의 교섭에서의 주도권 확보 등을 바탕으로 한 제한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목지국이 어느 시기부터 마한연맹체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3세기 후반에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한 한강 유역의 백제국에 의해 연맹체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소멸해간 것으로 짐작된다.
위만집단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기준집단이 서해를 건너 서남부 지역에 터를 잡고 한왕이라 칭했다.
해를 의미하는 <한>은 고대부터 남한지역을 의미하는 말이다. 기준이 한왕이라 칭한 것은 기준 자신이 남한의 왕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토착 인들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기준은 대가 단절되어 다시 마한인이 진왕이 되었다고 <후한서-한전>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진왕이 된 마한인은 번한(기자조선)의 상장군이였던 기탁이라고 본다. 기탁의 고향이 바로 마한이였기 때문에 요서지역에서 이주해 온 번한세력과 토착마한세력을 모두 융합할 수 있는 인물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위탁은 단군3한국 중에서 한반도와 열도를 영역으로 삼았던 마한의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마한 중심의 리틀3한을 남한지역에 만들게 되는데, 경상도 지역에 만든 진.번한이 그것이다.
번한유민들은 번한으로 보내고, 진한유민들은 진한으로 보내어 살게 한 것이다. 토착 마한인 진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한강에 십제를 세운 온조세력이나, 인천으로 들어 온 비류세력이나, 부여에서 나와 백제를 세운 구태집단이나 신라.가야를 세운 김알지.김수로집단이 모두 마한 진왕의 허락을 받아 땅을 분양받았다.
당시 진왕은 목지국에 있었다. 사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으나, 충남 직산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역사는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 직산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견이 나온다면 증명되는 셈이다.
마한이 다스린 남3은 부여에서 나온 구태 백제의 기마세력에게 서서히 잠식해 들어 가면서 마한의 지배집단인 진왕세력은 남하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익산을 거쳐 나주 영산강지역까지 남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금동관과 환두대도가 출토된 나주 반남고분은 대형 왕급 무덤군으로 고고학적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고 본다.
진왕이 서해로 통하는 영산강 지역을 왕도로 삼았다면 당시 영산강지역은 해양무역의 중심지일 수 밖에 없으며, 토착마한인들이 일찌기 이주해서 정착한 열도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서남해 해양세력은 마한의 진왕에 복속될 수 밖에 없으며,
진왕은 이들 해양세력(해)의 왕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천황의 원조도 남한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마한의 진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백제의 최강성기 근초고왕 시기에 남3한은 완전히 정벌되어 백제 영역이 되었으나, 영산강지역의 마한 자치권은 그대로 인정되어 제주도까지 실질적으로 지배해게 되는 동성왕 이전까지 유지되엇다고 할 수 있다.
6세기에 나주 반남지역에 백제인들의 무덤이 출토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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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료]考古學的 側面에서 본 馬韓-目支國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마한-목지국 문화의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전남지방에서 조사된
마한관계 유적의 성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마한-목지국 관련유적으로는 고인돌(支石墓)20)과 독무덤(甕棺墓)21)으로 대별되는 분묘유적과 생활유적인 집자리 유적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전 몇몇 선사시대 집자리 유적22)이 전남지방에서 확인된 바 있으나 마한시대에 해당하는 철기시대 후기23)의 집자리 유적은 조사된 예는 없었다. 그런데 1986∼1989년에 걸쳐 이루어진 주암댐 수몰지구 발굴조사에서 順天市 洛水里와 大谷里 道弄部落에서 대규모 집단취락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조사된 철기시대 후기의 집자리들은 전남지방에서 최초로 발견된 마한의 집자리들로 마한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분묘유적으로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 특히 전남지방에 1만 여기 이상이 무리를 이루면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과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철기시대 전기가 되면 지배적인 묘제가 되어 백제시대까지 사용된 독무덤이 있다.
전남지방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철기시대 전기에 이르기까지 축조되었는데, 이들은 당시의 정치·사회상을 밝히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고인돌 사회에는 전문장인이 존재했으며, 각 지역간에는 기술의 전파 및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이 고인돌 사회는 사회진화 단계상으로는 계급(rank) 사회인 족장사회(chiefdom society) 단계에 도달했다24).
앞으로 고인돌의 공간적인 분포에 따른 세력권 또는 문화권이 설정되고, 전남지방 고인돌이 지니는 독자적인 성격이 究明되면, 차후 이 지방에 등장하는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대형 독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영산강 유역의 반남면 일대를 포함하는 羅州지역은 全州와 함께 全羅道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을 만큼 고대 한반도 남서부지방에서 정치·군사·경제·문화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을 통해 볼 때 당시 이 지역에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이러한 물질적ㆍ문화적 기반은 반남면 일대를 포함하는 나주 지역에 마한 54국의 하나인 목지국을 비정하는 가설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학자마다 서로 견해가 달라 不彌(支)國27), 布彌支國28), 新彌國29), 치唎國30) 등의 馬韓 小國이 이 일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이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 비록 그 國名은 확실하지 않지만 나주 지역, 특히 반남면 일대에 분포된 고분군들의 연대로 볼 때 백제초기부터 국가단계의 정치체계가 이 일대에 존재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남면을 비롯한 영산강 유역 소재의 대형 독무덤들은 이 일대가 실질적으로 백제의 영향권내로
편입되기 이전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지배층들의 분묘들로 보여진다. 철기시대 전기 이후 새로운 철기문화를 수용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사회적인 발전을 이룩한 마한의 소국들은 그들의 통치 권력을 확대·팽창시키면서 소형 독무덤을 거대화시켰던 것이다. 제반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영산강 유역이 실질적으로 백제의 지배하에 편입되는 시기는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4세기 후반경인 近肖古王代(기원후 369년으로 추정)라기 보다는 대안리 5호분31)과 같은 백제의 석실분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6세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 유역에 밀집 분포하는 대형 독무덤들의 피장자들은 마한 제소국의 지배층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9호분의 피장자는 목지국 말기의 지배자, 또는 목지국의 전통을 이은 지방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가 남천하게 됨에 따라 백제의 지배영역이 남쪽으로 팽창함으로써 그 세력이 축소된 목지국의 최종 근거지는 영산강 유역의 나주 반남면 일대로 비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지금까지 발견·조사된 금동관들이 당시의 정치체제하에서 국가단계를 나타내는 최고 지도자 또는 왕의 상징물(status symbol)로서 인정되는 것으로도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최근 발굴된 나주 伏岩里 3호분32) (1996년 발굴, 석실 내부 옹관 4호) 출토 금동제 신발, 1997년 발굴된 石室 7호 출토 금판 관모 장식,
금동제 이식, 삼두 환두대도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1998년도 3월에 발굴된 제 5호와 16호 횡혈실 석실 2기에서는 銀製冠飾이 출토된 바 있다33). 이는 부여 하황리, 논산 육곡리 7호분, 남원 척문리, 나주 흥덕리와 扶餘 陵山里 공설운동장 예정부지내에서 발굴된 36호 우측(인골편은 남아있지 않으나 좌측에 남아있는 부인의 것으로 여겨지는 인골의 나이는 40세이상으로 추정된다34).)에서 발견된 은제 관식에 이어 한반도에서 여섯 번째로 확인된 것이다. 피장자의 신분은 백제 16관등 중 6품인 奈率 이상에 해당되는데, 이는 대안리 5호분35)의 백제식 석실분의 경우와 함께 피장자가 나주지역이 백제의 행정체제내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금동 신발인데 이는 新村里 9호분, 公州 武寧王陵, 益山 笠店里에 이어 백제지역에서 네 번째, 나주에서는 두 번째로 확인된 것이다36). 또 1998년 4월 3일 나주 복암리 3호분 제 8호 석곽 옹관에서는 朱漆의 逆卍字文37)이 시문된 蓋杯(제 8호 옹관)와 함께 일본 고분시대말기에 보이는 圭頭大刀가 제 5호 석실 연도 가까이의 玄室벽에 기대어 놓인 채로 확인되었다. 출토상황으로 보아 이 칼은 현실에 묻힌 피장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장례행사에 참석했던 피장자와 가까운 손님이 마지막으로 끌러놓은 葬送禮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복암리 3호분의 내부에서는 옹관묘, 수혈식 석곽, 횡혈식 석실, 횡구식 석곽, 횡구식 석실과 석곽 옹관 등 34기에 이르는 매장유구가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약 300여년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한 집안의 가족묘지(世葬山)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과 같은 墳坵는 마지막으로 5호 석실분을 쓰면서 각각의 무덤에 조성된 봉토가 합쳐져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 피장자들은 과거 목지국의 지배층을 형성하는 토호들로 후일 이 지역이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에서 백제왕실이 하사한 벼슬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무덤에도 백제양식을 채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圭頭大刀를 통해 시사되는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는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것이다.
은제 관식의 연대를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로 볼 수 있다면 목지국의 잔여세력인 토착세력은 거의 백제멸망시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볼 때 목지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마한 제소국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공시적으로 상호 대등한 수준의 관계를 맺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馬韓 諸小國의 맹주국으로 알려진 目支國의 위치 비정에 대한 종래의 견해들을 살펴보고,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羅州 潘南面 일대를 목지국의 최후 근거지로 비정하는 필자의 가설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남아 있는 문헌자료 및 고고학적 자료가 매우 영세하며, 더구나 얼마 되지 않는 문헌자료는 그 자료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낼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현 시점에서 어떤 확정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필자 나름대로의 연구를 통해 얻은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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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역사자료]단군3조선 붕괴이후 열국시대
1) 국가의 출현 배경 :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다른 부족과의 연합 또는 전쟁이 빈번해짐에 따라 세력을 확대하여 국가로 발전하는 세력이 출현하였다.
(2) 여러 나라의 등장
① 만주 지방 : 부여와 고구려와 동부여,읍루(숙신)가 출현하였다.
② 한반도 북부 동해안 지방 : 옥저와 동예가 자리를 잡았다.
③ 한반도 남부 지방 : 삼한이 발전하였다.
ㆍ마한 : 한강 이남 황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54개의 소국 중 가장 강력한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의 왕으로 행세하였다.
ㆍ진한, 변한 :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 졌으며, 마한 진왕의 통치를 받았다.
2. 각 나라의 정치 조직
(1) 부여
① 5부족 연맹 : 5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세운 연맹 왕국이었다.
② 왕 밑에 가축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관리가 있었다.
(2) 고구려 : 5개 부족이 연합하여 세웠는데, 왕의 권력은 강하지 못했다.
(3) 옥저, 동예
① 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지배자가 없었다.
②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들이 각 부족을 다스렸다.
(4) 삼한
① 정치 : 신지, 읍차 등으로 불리는 족장들이 정치를 담당하였다.
② 제정 분리 사회 : 천군이라고 불리는 제사장은 소도라는 특별 구역에 머물면서
제천 행사를 담당하였는데, 이는 삼한 사회가 제정 분리 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법률과 풍속
1. 기본 법률
(1) 나라마다 사회 관습, 종교 의식 및 법률이 있었다.
(2) 기본법 : 고조선의 법과 유사하였으며, 살인이나 남에게 상해를 입힌 죄, 도둑질 등에
대한 벌칙 등 사회 유지를 위한 기본법을 두었다.
2. 풍속
(1) 부여
① 순장과 껴묻거리를 묻는 장례 관습이 있었고,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제가 있었다.
② 제천 행사 : 12월에 영고라는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죄
인을 풀어 주기도 하였다.
(2) 고구려
① 무예 숭상 : 무예를 중히 여겨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였고, 수렵 대회, 씨름 대회
등을 열어 신체를 단련하였다.
② 서옥제(일종의 데릴사위제)와 무덤 속에 금,은 등을 묻는 풍습이 있었다.
③ 제천 행사 : 10월에 동맹이라는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온 백성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조 추모왕와 유와부인에게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다.
(3) 옥저
①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었으나,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삼베, 소금, 어물
등의 특산물을 고구려에 바쳤다.
② 어린 며느리를 맞이하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한 가족의 뼈를 함께 매장하는 가족공동 묘의 관습이 있었다. 매장풍습은 아메리카로 이주한 인디언(만주와 한반도) 풍습에도 나타난다.
(4) 동예
① 책화 : 산천을 중히 여겨 각 부족이 소유한 산천에는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았으며,
읍락끼리는 서로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를 어기면 소, 말 등으로 갚아야 했다.
② 족외혼 : 같은 씨족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③ 제천 행사 : 10월에 무천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5) 삼한
① 벼농사 발달 :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저수지가
많이 축조되었다.
② 풍부한 철 생산 : 변한에서는 철을 많이 생산하여 마한,일본 등으로 수출하였으며,
철을 화폐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③ 제천 행사 : 씨뿌리기가 끝난 5월과 추수가 끝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술
자리를 베풀고 축제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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