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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전문에 규정해야 할 대한민국의 건국 1만년을 인정하는 <한기>를 사용하고, 마고.한인.한웅과 한검(단군왕검)을 민족통합의 국조로 삼고. 홍익인간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반공.자유.민주.인권.복지.공영을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족민주보수우익 정당이 대한민국에는 부재하다. 뿌리와 민족혼을 회복하는 1만년 한국사의 인식부재가 낳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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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도 참여했던 민주당의 창당노선은 반공 자유민주주의
이승만과 함께 했던 반공 민주당의 뿌리는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해방직후 김성수 송진우 등이 참여해서 만든 한국민주당(한민당)이다. 한민당은 공산주의를 채택한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를 기치로 내걸고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선 중추세력이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과 건국을 주도한 신익희 초대국회의장·조병옥 경무대장이 합류해서 1949년 민주국민당으로 통합했고 1955년 민주당으로 확대된 정통야당이었다.
통합진보당의 정강정책은 국가보안법 폐기, 주한미군철수, 한미동맹해체, 국군해외파병금지, 군복무 12개월단축, 원전폐지, 30대재벌해체,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주기별 복지확대등이다. 민주당은 이러한 종북좌파 정당과 세력과 연대하여 이끌려 다니며 오히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들 두 야당이 중국정부의 탈북주민 북송에는 침묵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한 제주해군기지 건설반대등 안보와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책에 합의한 것도 이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 지금은 해방이후 가장 극심한 좌우이념대결의 시대다. 민주당이 해방정국에서 공산당을 타도한 한민당의 창당정신을 되찾아 종북좌파에 맞서는 중심에 서줄 것을 기대한다.
김일성집단을 반대한 반공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았던 정통 민주당이라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했던 반국가 이적행위자 이석기를 사면복권시켜 주고, 김정일 앞에서 국제외교에서 북한을 대변해 왔다,남한에서 여론조사하면 미국이 가장 나쁜 나라1위로 나온다, NLL이 무슨 영토선이냐 위로 올라 가든 아래로 내려 오든 어떤 합의를 하더라도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등의 노골적인 반국가적인 언행들을 일삼아 온 내부의 종북 노랭이(종북친노) 세력부터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이 보기에는 사이비 민주당 밖에 안 된다. 민주당이 국민적 지지을 받으려면 민주당이 어떤 정신으로 창당했는지 뿌리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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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자유당 창당과 몰락
민주당에서 나온 이승만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직선제 개헌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으나 이기붕 일가의 독재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치적 욕심은 독재를 낳았고 결국 정치적 몰락과 비참한 죽음을 낳고 말았다. 이러한 이승만과 박정희의 비참한 전철은 군사독재왕조를 구축하고 있는 북한의 김일성 일가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정부수립 초기 정당무용론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화되자 정국타개를 위한 자유당의 창당을 서둘렀다. 즉 야당인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 주도의 국회에서 직선제로의 개헌이 통과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원외에서 광범위한 관제(官製) 민의운동을 일으켜 국회에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채택, 원외 자유당을 지지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창당과업은 당시 주(駐)중국 대사로 있던 이범석에게 맡겨졌으며, 창당준비 당시의 자유당은 원내의 공화민정회 외에도 원외의 국민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부인회·농민조합총연맹 등 핵심적 사회단체를 망라했다.
1951년 11월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찬반양론의 대립 속에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 하나의 이름으로 2개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형태로 자유당은 창당되었다.
이승만을 당수로, 이범석을 부당수로 하여 직선제 개헌안 지지를 표명한 원외 자유당 세력은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과 5개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후 자유당의 주류가 되었다. 1952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원내 자유당은 합동파(삼우장파)와 잔류파로 분리되는 등의 이합집산과정을 통해 결국 원외 자유당에 통합되어 단일 자유당이 출현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원외 기반을 구축하고 개헌안을 통과시킨 이승만은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확신하고 당내 제2인자인 이범석의 족청계를 외면하고 정부통령선거 전에 함태영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이러한 족청계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는 이범석의 부통령후보 탈락과 함께 당내 결속에 동요를 가져왔고,
자유당의 지도체계는 이기붕을 2인자로 하는 체제로 개편됨과 동시에 권위주의적 정당체계로 변모했다. 같은 해 5월 20일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은 114석을 확보하고, 친여적인 무소속의원들을 포섭함으로써 개헌정족수를 상회(上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국회는 자유당의 전횡(專橫)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을 폐지하고 국무위원불신임권을 삭제한 사사오입개헌파동 등을 일으키며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기도하다가 1960년 3·15부정선거로 폭발된 4·19혁명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출신의 인사들은 5·16군사정변 이후 혁명 주도세력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공화당에 대거 입당하여 정계에 재진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