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대와 1990년 대 초반 무렵 대학을 다니던 학생들에게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필독서와도 같았다. 지금은 인문학 경시풍조와 급변하는 세계 정세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그 시절 대학가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 곳은 비단 운동권 학생들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에 의문을 품고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청춘들을 위한 불온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필자 역시 이 곳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와 TV를 통해 주입되었던 지식들이, 사실은 모순으로 가득찬 비현실적인 세뇌교육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그 무렵 운동권 학생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사상적·이론적 지식과 배경을 무장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그 곳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설정해 놓은 반쪽짜리 세상에서 벗어나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열린 공간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불온성을 상징하는 폐쇄된 공간이기도 했다. 이 곳은 탈피를 통해 나비가 되기를 갈망했던 젊은 지성들이 꼭 가야만 하는 장소였고, 반드시 머물러야만 했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필자도 이 곳에서 헤겔을 만나고, 마르크스와 조우했으며, 체 게바라의 투쟁과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함께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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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필자가 문득 80년 대의 그때를 추억하게 된 것은 '내란음모죄'가 적용돼 구속수감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과 이 사건을 동아줄로 삼아 국면전환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새누리당 및 국정원, 수구보수세력의 지나친 공안정국 조성국면에 한숨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 통합진보당 경선부정사건과 똑같은 흐름으로 흘러가는 이석기 사태
마치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번 사건은 지난해 총선 직후 한달이 넘도록 정국을 술렁이게 만들었던 통합진보당 경선부정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당시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였던 통합진보당 경선부정사건의 본질은 진보당 내부에서 자행된 패권주의와 반민주적 행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계열(NL)과 진보신당 계열(PD)에 참여당이 가세해 만든 정당이었다. 따라서 각 계파의 입장과 시각이 첨예하게 다를 수 밖에 없는 정당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내부 수습과정을 거쳐 합리적으로 봉합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같은 태생적 한계와 약점은 통합진보당 보다 새누리당과 수구보수언론이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새누리당과 수구보수언론은 종북과 색깔론으로 매도했고 이를 합리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진보당의 내부 분열로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통합진보당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민주통합당은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이에 따라 광우병 사태에 대한 정부의 거듭된 거짓말, 민간인 사찰, BBK 의혹 재점화, 내곡동 사저 문제, KTX 민영화 문제, 이상득 의원 비자금 사건, 새누리당 김형태·문대성 당선자 자질 논란, 정권의 핵심인사들이 관여되어 있는 파이시티 사건, 4개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등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과 중요한 민생 현안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민감한 진보적 이슈들을 제기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해야 할 시점에 통합진보당의 경선부정사건, 더 정확히는 새누리당과 수구보수언론이 사태의 본질을 매도하고 덧칠한 종북주사파 논란이 이처럼 모든 이슈들을 일거에 잠재워 버린 것이다.
그때의 상황과 현 정국은 매우 흡사하다. 민주당은 '내란 음모죄'란 무시무시한 주홍글씨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형국이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규탄하고 있는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의혹이 '이석기 사태'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궤도에서 이탈한 듯이 보인다. 촛불민심에는 철저하게 외면했던 방송과 언론이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이번 사태를 대서특필하고 있고,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의혹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이번 기회에 (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종북세력의 싹을 잘려버려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으름장을 놓고 있다.
■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색깔론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어김없이 등장하며 단번에 사태를 해결하는 기묘한 능력을 지닌 색깔론은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수구보수들을 위한 전가의 보도이자,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종북'이라는 주홍글씨는 궁지에 몰려있던 특정세력들을 어느 틈엔가 무적의 철인 28호로 돌변하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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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28호로 변신한 이승만에 의해 죽산 조봉암 선생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해야 했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평생 빨갱이란 낙인이 찍힌채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좌익, 혹은 빨갱이란 이름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어디 그들 뿐이랴!
■ 너희가 진정으로 종북을 아느냐?
지난해 통합진보당 경선부정사태에 이어 이번에 다시 거론되는 종북세력과 주사파 논란은 색깔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진화시킨 결과이다. 북한체제를 무비판적으로 흠모하고 따르는 세력을 의미하는 '종북세력'과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주체사상은 80년 대를 통해 대학가에서 북한의 혁명이론을 근거로 외세, 더 정확히는 미제국주의의 축출과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을 강조하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체 게바라의 투쟁기,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 등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군부독재체제에 맞서 이 시기 운동권에 몸담고 있던 학생들에게는 필독도서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군부독재체제 하에서의 민주주의 탄압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체제의 하나로써 공산주의 체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이 일명 주사파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새누리당에도 과거 주사파로 활동했던 의원들이 상당수 있고, 그들을 보좌하는 보좌관, 지구당 위원장, 원외 위원장 들 중 다수가 과거 운동권 시절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반국가세력의 일선에서 맹활약했던 인사들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1980년 대 운동권 출신들에게 있어 북한체제는 모순덩어리로 비춰지기만 했던 독점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대체제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한편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서 학습했던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북한은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며,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3대 부자 세습을 하고 있는 독재왕국에 불과하다. 외국자본과 구호단체의 인도적 지원이 없으면 버텨낼 수 없을만큼 북한의 경제난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처럼 그 실상이 낱낱히 공개되고 있는 북한의 체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체제로서의 의미를 상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는 실패한 구체제일 뿐이며, 따라서 보편적 상식과 이성을 가진 국민에게 '종북'은 허무맹랑하고 시대착오적인 과대망상에 다름 아니다.
■ 민주주의의 기본을 망각한 종북몰이
안타깝게도 우리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철저히 무시되는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으로 규정짓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격하기만 한다면 서로 다른 생각들이 다양하게 소통하고 조정과 합의의 과정을 거치는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낳게 되고, 사회구성원들간의 극단적인 분열과 혼란이 더해질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을 특정세력이 주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진다. 해방이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으로 사회적 혼란기를 겪어야만 했던 대한민국, 그리고 이후 맞이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정권유지와 수구기득권세력의 체제유지를 위해 악용하고 있는 특정세력에게 민주주의의며, 역사며 국가와 국민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논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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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야만 하고,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정화되는 자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깨끗해 진다. 민주주의의 원리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다양한 의견이 서로 소통하고 갈등하고 부딪히면서 사회구성원들의 보편적 상식과 합리적 판단을 거쳐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토대로 보자면, 시대흐름과 국민의식에 반하는 사상을 주장하거나 과거에 매몰된 채 시대를 역행하는 세력들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사회구성원들에게 의해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 밖에는 없다. 대관절 어느 국민이 3대 세습체제의 참담한 실상과 폐해가 모두 공개되고 있는, 실패한 북한체제를 따르고 추종하려 한단 말인가?
■ 국민에게 철퇴맞을 종북세력, 그 다음 대상은?
새누리당과 수구보수언론의 종북몰이는 그런면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망각한 파시즘적 광기에 다름 아니다. 새누리당과 수구보수언론이 굳이 종북세력을 발본색원하지 않아도, 저들은 스스로 퇴화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누구보다 종북세력의 준동을 원하고 있고, 그들의 명맥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세력이 바로 새누리당과 수구보수들이라는 데에 있다. 이 둘은 결국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 적대적으로 공생하며 민주주의의 합리적 기능을 저해하는 암적인 존재들인 셈이다.
3년 간 벼르고 별렀다던 국정원의 치밀한 내사 덕분으로 종북세력이 국민들의 철퇴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다음 번에 국민으로부터 철퇴를 맞게 될 세력들이 누가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새누리당과 수구보수세력의 눈엣가시인 진보세력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세력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주지한 바와 같이 시대흐름에 반하거나 민의를 역행한 채 과거로 치닫는 세력들에게는 언제나 예외없이 국민들의 심판과 응징이 내려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과연 누구일까? 다음 대상은?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