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말 뉴라이트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한국현대사학회가 주도한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가 국가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통과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입장을 반영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해당 출판사는 논란이 거세지자 관련 내용을 부인한 바 있다. 그러나 3개월의 심의과정을 거쳐 최근 공개된 교과서의 내용은 우려했던대로 일본제국주의시대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미화하고 이승만·박정희 독재시대를 정당화하는 내용들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동안 이 교과서를 둘러싼 세간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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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통과하며 논란을 야기시켰던 까닭은 교과서 편찬과정에 한국현대사학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뉴라이트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자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폐기하고 새롭게 결성한 단체였다.
안병직 전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유영익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차상철 교수 등 참여한 인사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이 단체가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진행되었던 과거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자신들, 더 정확히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도전과 위협으로 규정하고 이를 다시 뒤집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왔다.
■ 민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전면 부정한 수구보수정권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한 이명박 정권은 이 기간동안 시행된 교육정책,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 움직임을 주도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 계열이었고,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공동대표로 있었던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이 중심이 되어 교과부에 교과서 수정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이들은 자학사관 반대,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복권, 과거사 청산 반대 등을 주장하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추진되었던 교육정책을 문제삼고 대대적인 교과서 수정을 요구했으며, 교과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해당 출판사에 한국 근·현대사의 교과서 6종에서 모두 55건의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수정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검·인정 도서의 합격을 취소하거나 1년의 범위에서 검·인정 합격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조항으로 인해 출판사의 입장에서 이는 사실상 '수정요청'이 아니라 '수정명령'과도 같았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출판사들은 교과서의 내용을 바꿀 수 밖에는 없었다.
금성출판사 및 다른 출판사의 근·현대사 6종 등 모두 55곳의 내용에 수정명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이 '좌편향'이라고 비판하던 교과서를 이번에는 지극히 '우편향'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2011년 8월 교과부는 역사교육과정을 손보면서 교육계와 역사학계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확정해 버렸다.
또한 '이승만 독재', '5·16 군사정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사라졌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80% 가량이던 근·현대사 비중을 50% 수준으로 낮추었다. 그 해 10월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일본 국왕'을 '일본 천황'으로 바꾸라고 권고하기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부분에서는 김구에 대한 설명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2011년 확정된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안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을 삭제하고 정부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기술하며,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정통성과 업적을 강조하는 등 뉴라이트가 주장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명박 정권에서 마침내 뉴라이트가 주도하는 친일역사관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 이명박 정권의 뒤를 이어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 G20 정상회담에 참석 중이다. 출국에 앞서 지난 9월 2일 러시아 최대 국영통신사인 이타르타스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는 저에게 국가관, 정치철학을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을 미치신 분"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철학과 국가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그래서였을까? 박 대통령의 역사인식은 아버지 시대를 관통하던 친일식민사관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행적을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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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이 주축이 되어 만든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 교과서의 출판으로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역사인식이 뉴라이트의 그것과 정확히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6월 10일에는 '2013년 청소년 역사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응답자의 69%(349명)이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답한 것을 문제삼으며 "교육현장의 역사왜곡이 한탄스럽다. 이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새 정부에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아전인수식 발언이었다. 이 기사는 이명박 정권에서 도입한 집중이수제가 효율성만 강조한 채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부실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역사교육의 심각성을 파헤치려는 의도의 기사였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이를 교묘하게도 교육현장에서 역사교육이 왜곡되고 있다며 정부차원에서 이를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사실을 호도했던 것이다.
이후 박 대통령은 역사교육 강화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고, 정부는 최근 한국사의 수능필수화 방침을 발표했다. 언론이 발표한 헤드라인 기사만 보면 박근혜 정부가 왜곡된 역사교육을 바로잡기 위한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러나 이는 박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언론과 방송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이미지 조작에 불과할 뿐이다.
■ 검정통과한 역사교과서로 한국사를 강화한다고?
검정을 통과한 문제의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을 살펴보자. 이 교과서는 군대위안부 강제동원이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표된 이후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왜곡이다. 위안부 동원시점은 1930년대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상당수의 일본 교과서에도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다. 가해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내용을 오히려 피해자들이 축소·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미화도 상당하다. 대표적 친일파인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 김연수 경성방식 창업주,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장덕수 동아일보 초대 주필, 극작가 유치진 등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고, 이들의 경제·사회적 행위에 촛점을 맞춤으로써 어쩔 수 없는 시대상황론을 피력하고 있다.
역대정부에 대한 평가 역시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는 찬양일색,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이승만·박정희 독재시대에 대한 평가 역시 기존 뉴라이트 계열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처럼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의 내용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가치를 부정하는 내용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최근 정부는 한국사의 수능필수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편향·왜곡된 역사교과서의 검정통과와 맞물려 그 저의가 대단히 불순하기 이를데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무장한 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미화하고 이승만· 박정희 독재시대를 정당화하는 역사교과서로 한국사를 강화하겠다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 역사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박 대통령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사회구성원들은 역사를 통해 현재를 살아갈 동력을 얻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에게는 역사를 가치중립적으로 보전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시절 자신에게 제기된 역사인식 논란을 비껴가기 위해 늘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라고 말해 왔다. 그런데 이 말은 후대의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가치중립적으로 합의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자는 의미이지, 권력을 가진 권력자 혹은 집단이 역사문제에 개입해서 역사적 사건을 왜곡하고 미화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 역시 자신들의 입맛대로, 취향대로 역사를 뜯어 고쳐나가고 있다.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결여된 정치인과 정치지도자, 권력에 정의와 양심을 저당잡힌 학자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고 있다. 피와 땀으로 이룩한 대한민국의 숭고한 역사 마저 난도질해 대고 있다. 과연 저들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어디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끝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과 조우하게 될까? 영혼없는 저들의 폭주가 불안하고 또 불안하기만 하다.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