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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중 호남사람이 민족자부심 가장높아
우리나라 국민들 가운데 민족자부심이 가장 강한 지역민은 호남지역 주민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국제여론조사지 2006년 봄호에 실린 미국 시카고 대학의 톰 스미스 교수의 '민족자부심 국가비교'논문에 실렸으며 국제적으로 공인된 여론조사지가 게재한 논문이라는 점에서 객관성,정확성,신뢰성을 높여주었다.
관련논문에 따르면 세계 33개국을 대상으로 민족자부심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국민은 노르웨이와 함께 22위를 차지,비교적 민족자부심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한국민은 일반적인 민족자부심에선 19위, 과학기술, 예술, 스포츠, 세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부분에서 자국의 성취도를 물은 민족자부심은 서독(동독지역은 분리 조사),스웨덴 국민과 함께 꼴찌에 가까운 공동 30위로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국가별로 나타난 민족자부심 정도를 보면 일반적인 민족자부심에선 제네수엘라가 1위, 미국이 2위를, 영역자부심에선 미국이 1위, 베네수엘라가 2위를 차지하여 미국과 베네수엘라 두 나라가 공동 1위를 차지, 민족자부심이 강한것으로 밝혀졌다. 동아시아 국가중에서는 일본은 우리보다 높은 18위, 대만은 우리보다 낮은 27위로 비교적 민족자부심이 낮게 나타났다.
조사결과 특이한 것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1위),캐나다(6위), 뉴질랜드(8위)와 스페인 식민지였던 칠레(7위), 우루과이(14위), 필리핀(9위)로 나타나 종주국이었던 영국(19),스페인(17)에 비해 민족자부심이 높다는 사실이다.
각국별 조사대상자를 사회집단별로 구분하여 볼때 일반적인 민족자부심은 대부분의 나라가 지배문화집단에 속하는 국민들이 소수 피지배집단에 비해 민족자부심이 높은것으로 나타났지만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필리핀의 이슬람교도는 지배세력인 유럽인종과 비이슬람교도에 비해 민족자부심이 높았다.
호남인의 민족자부심은 구국항쟁정신의 산물
한국에서의 호남인들은 신라통일이래 오늘날까지 비호남 범지배집단으로부터 소외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국가의정책적 혜택으로부터도 항상 밀려났었다.그러나 국가로부터 인사,정책 등 전분야에서 혜택을 누린 비호남 지배집단에 비해 일반적인 민족자부심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호남사람들은 다른 지역민들에 비해 "나는 다른나라 국민이기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게 더 좋다"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호남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소외받고 비호남지역민들로부터 차별받았으면서도 다른 지역민들에 비해 이처럼 일반적인 민족 자부심이 높은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이러한 현상은 호남지역민들의 구국투쟁정신과 의지와 무관하지 않는것 같다.
우리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외세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109- 108년 한나라 무제의 고조선 침입과 고구려의 수,당 투쟁, 백제와 신라의 나당투쟁은 물론이고 삼국통일이후 오늘날까지 역사 또한 우리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상황으로 몰릴만큼 외세의 침입에 의한 큰 전란이 여러번 있었다.
대표적인게 거란과 몽골의 고려침입, 조선시대 임진왜란,조선말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의 재침이었다. 이러한 국난을 맞아 우리민족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떨쳐 일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구국항쟁을 전개 하였다. 그가운데서도 호남지역민들의 구국항쟁은 끈질기고 적극적이었을 뿐아니라 향토방위 성격을 넘어 국가방위차원으로 전개되었다.
1231년부터 1270년까지 40여년동안 몽골과의 전쟁끝에 고려정부가 원에 항복,화의를 수립하자 배중손과 김통정등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몽골과의 화의를 거부하고 1273년까지 3년에 걸쳐 대몽항쟁을 전개하였다. 삼별초군이 호남지역으로 후퇴하여 진도를 중심으로 항쟁을 벌일때 호남지역민들은 집단적으로 삼별초에 합세하여 대몽 구국투쟁에 나섰다.
호남인들의 강한 민족의식과 자주성,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은 조선조에 들어와 국가와 민족의 존립이 크게 위협받은 임진왜란을 맞아 더욱 빛을 발하였다. 당시 호남인들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총체적인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는바 타지역 의병이 향토방위적 지역성격을 띤것과 달리 호남의병은 경기,충청,경상지역까지 진출,지역을 초월한 국가방위적 차원에서 대일 구국항쟁을 벌였다.
나주출신 김천일과 이종인,광주출신 고경명 고종후 부자,김덕령과 정충신, 보성의 임계영,능성의 최경희, 남원의 김익복과 양대박,화차를 제작한 변이중,고흥출신 정명세, 장흥출신 위대기 등 수많은 의병장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싸웠다.임진왜란 당시 거둔 3대첩 속에는 모두 이러한 호남장병들의 투혼이 서려있다.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휘하의 전라좌수영과 이억기 장군이 거느린 전라우수영의 전라도 수군장병들이 한산도 부근 해상에서 왜군의 수군 주력을 격파하여 청사에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거두었다. 1593년 2월에는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이 이끈 호남장병 1만 5천명과 김천일 장군의 의병이 연합하여 행주대첩을 거두었고 진주대첩 또한 호남의 최경회,임계영 의병군이 김시민의 관군과 연합작전을 펴 승리하였다.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이 도망치고 도원수 김명원의 관군이 방관하는 가운데 호남의병장 김천일 상건부자, 고종후와 부사 이종인, 병사 황진, 최경회, 의기 논개등 수많은 호남장병들이 고군분투하다 진주성과 최후를 같이 하였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호남의 남여노유들은 농사에 전념,임금 행재소 소요식량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병참기지와 병력충원 역할을 다하였다.
근대 민주,민중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동학혁명 또한 전봉준 장군 휘하의 동학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최대의 자주적 민족운동으로 구한말 반일 의병항쟁으로 발전하는 기폭제 역할을 함으로써 호남지역이 구한말 대일항전의 중심지가 되도록 만들었다. 대일 의병항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08~1909년 사이 호남의병 교전현황을 보면 1908년 전국 의병교전 횟수의 25%인 493회,참전의병수는 47.3% 3만 504명, 1909년에는 전국 의병교전 횟수의 47.3%인 820회, 참전 의병수는 60.1%인 2만 3155명으로 대일의병 구국항전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호남의병의 결사항전에 부딪힌 일제는 호남인들의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말살하지 않고서는 임진왜란 당시처럼 조선병합이 실패로 끝날 수 있다고 판단, 호남지역에 대병력을 투입 남선대토벌 작전을 전개 호남을 유린하기에 이르렀다. 1909년 9월 1일부터 2개월동안 1개여단을 호남에 투입하여 무자비한 그물치기식 무력작전으로 심남일,강무영,안규홍,임참모,안찬재 등 103명의 대.소 의병장이 피살 또는 체포되고 3천여명의 호남의병들이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남선대토벌 작전으로 호남을 초토화 시켰지만 호남인들의 민족의식과 자주정신,저항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3.1운동 당시 경기도와 평안도 다음으로 많은 29만 48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1929년 11월 3일에는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인 광주학생의거를 일으켰다.
호남인들의 민족자부심은 이처럼 국가와 민족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였을때 초개같이 목숨을 던져 외세와 싸운 구국 항쟁정신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명박근혜정권의 호남죽이기, 호남의 투쟁정신,민족 자부심으로 정면격파해야국난이 수습되면 비호남 범지배세력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신들의 조상과 지역 출신들에 대한 공적은 국난극복,구국영웅으로 성역화,현양한 반면 호남의 우국투사 후손들에게는 문서상의 직책인 동몽교관,참봉교지나 내려 주는 것으로 끝냈다.또 우국충정의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축소하였을뿐만 아니라 정여립사건,동학 혁명,좌익군인에 의한 여순사건을 난으로 규정,호남을 반역의 고장인 것처럼 폄하,매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