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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덥고, 갈수록 난장판 같은 정치판은 멀리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 같다. 그러나 아무리 덥고, 참으려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때가 있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의 한 기사는 나의 눈을 의심케 했다. 마치 지나가는 행인에게 아무 이유없이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겨레 신문은 <정동영 전주 재보선 ‘낙향출마설’…다시 비판론 솔솔>이라는 기사에서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이 이번 10월 재보궐선거 때 ‘전주 완산을’에 출마하는 이른바 ‘낙향출마설’이 민주당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데, 호남 지지세가 만만치 않은 ‘안철수 세력’을 꺾을 민주당 후보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당을 위해 정 고문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고,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는 '설'에 대해 썼다.
기자는 "2009년 4·29 재보선 때 당의 만류를 무릅쓰고 민주당을 탈당해 ‘전주 덕진’ 보궐선거에 나간 ‘전력’이 있는 정 고문이 또다시 당선이 손쉬운 낙향출마를 강행하면, 다른 지역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2009년 당시 민주당의 정세균 지도부가 '반 이명박 전선 강화에 기여하지 않는 고향 출마는 옳지 않다'며 공천 배제 방침을 밝히자, 정 고문은 민주당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강행해 ‘골목대장’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고 꼬집었다.
또 "한 호남권 의원은 '만약 출마한다면 2009년에 이어 다시 동네 정치인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삼척동자가 봐도 정동영의 재보선 출마를 가정하고, 이를 비난하기 위해 4년 전 '정동영 죽이기'에 나섰던 당시 당 지도부의 논리를 그대로 인용해 가며 작심하고 쓴 기사다.
순간 지난 3년 동안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용산참사, 한진, 쌍용차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길바닥을 헤매던 정동영이 왜 또 욕심을 부릴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또 변한 것인가.
그래서 찾아봤다. 그런데 웬걸. 정동영은 불과 몇일 전에 여러 언론과 인터뷰에서 "10월 재보선에 나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찾는 데 불과 10초도 안 걸렸다. 10초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한겨레 기자만 모를까.
한겨레는 왜 정동영이 이번 재보선에도 지난 2009년 때와 똑같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을 위해 고향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처럼 가정해 감정 섞인 비판 기사를 휘갈겨댔을까.
한겨레는 이번 기사에서 몇가지 중대한 사실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첫째, 이번 10월 재보선에 정동영 상임고문이 출마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이미 밝혔음에도, 마치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해 비판를 가했다. 게다가 전주 완산을은 현재 재판 진행상 이번 재보선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국 언론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특정 정치인을 인격적으로 맹공격한 것이다.
둘째, 2009년 재보선과 2013년 재보선에서의 정동영 출마설은 정반대의 상황에서 얘기되고 있다는 걸 의도적으로 묵살했다. 2009년은 당의 만류가 있었음에도 출마를 강행한 것이고, 2013년 재보선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안철수 세력과 호남 주도권을 놓고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 당장 민주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민주당이 이기기 위해서는 정동영 같은 경쟁력있는 인물이 나서서 당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 의식에서 '정동영 차출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한겨레 기사는 정동영이 마치 이번에도 국회의원 배지 욕심에 당선이 손 쉬운 고향에 다시 출마하려는 속 좁은 정치인으로 매도했다.
대구에서만 출마한 박근혜 대통령도 골목대장?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내가 오늘 한겨레신문에게 크게 실망한 것은 따로 있다.
정동영의 고향 출마 자체를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나 또한 그런 비판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은 정동영이 전주 재보선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것은 '골목대장이나 동네 정치인이 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호남에서 당선되면 골목대장이나 동네 정치인이라니. 그럼 대통령이 되기까지 대구 달성 지역 국회의원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은 '골목 대통령', '동네 대통령'이란 말인가.
왜 영남에서 출마해 당선된 의원은 전국 정치인이고, 호남에서 당선된 의원은 동네 정치인이 되어야 할까.
나는 그 바탕에 의도했든 아니든, 호남과 호남 유권자 비하, 호남 차별적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 표현들이 진보 언론에서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당연한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이다.
개혁과 진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언론마저 그런 호남 비하와 차별적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진보 정치인을 깍아내리는 데 지역주의를 동원하는 건 매우 서글픈 일이다.
정동영이 재보선에 출마하든 안 하든 당과 본인의 판단에 달린 일이다. 정당과 정치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유권자의 정당한 평가를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링에 올라갈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을 자기 멋대로 링에 올려놓고 '호남에 출마하려는 동네 정치인'이라고 비아냥대는 것. 그건 이전의 '정동영 죽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보언론의 사명을 망각한 채 호남비하 인식을 드러내면서까지 끌어내려야 할 만큼, 정동영이 지금 민주당에서, 한겨레에 대해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 것일까.
한겨레의 느닷없는 정동영 죽이기의 의도가 혹시 재보선을 앞두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외부에서 주문생산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겨레가 자신들의 역사마저 부끄럽게 만드는 지역주의에 물든 기사를 내보낼 정도의 신문인가. 이래저래 머릿속이 혼란한 하루였다.englant7@gmail.com
<김영국: 정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