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진보학자로 명망이 높은 최장집 교수가 쓴 <책임정치를 위하여>란 칼럼이 있다. 이 칼럼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위해서는 대통령 개인의 사인화된 정부가 아닌 정당의 정부를 만들어야 하며, 이를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장문의 이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민주정치는 대표의 선출과 함께 선출된 대표가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에게 책임지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 즉 평상시에도 선출된 통치자가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 때만 민주주의가 있고 평상시에 없다면, 그것은 왕을 선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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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두가 잘 아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어서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적혀있다. 수많은 헌법 조항 중 이 두 조항이 첫번째와 두번째를 차지하고 있으니 정권을 막론하고, 지향해야 할 헌법가치의 으뜸 중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헌법조항은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비춰진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도 아니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모든 권력 역시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정원에 의해 자행된 불법대선개입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국가권력 및 정치권력의 폭주가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를 짓밟은 자들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공동체의 의사를 반영하고 실현하는 정치사회 체제인 대의민주주의의 핵심구현원리의 기본이 바로 선거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대의정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가 합리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거의 공정성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다수 공동체의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는 방향성을 상실하고 표류하게 된다.
그런데 지난 대선은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특정후보가 유리하도록 계획적으로 선거에 개입했고, 이 과정에 경찰과 새누리당 역시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이 검찰조사결과 드러났다. 다수 공동체의 정치적 사상과 정책실현의 도구가 되어야 할 선거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특정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악용된 것이다.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과 경찰의 축소·은폐 수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공유했던 새누리당의 행위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원리라 할 수 있는 주권재민의 대원칙마저도 무너뜨린 있을 수 없는 폭거였다.
■ 박근혜 대통령의 침묵, 책임정치를 외면하는 것
그러나 사실상 국정원 게이트와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현 박근혜 대통령이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국기문란사건에 대해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은 물론이고 진상규명과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수만명의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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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에 반하는 어떠한 도전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신념이 대통령에게는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국정원 게이트와 관련된 불법과 부정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굳이 로버트 달(Robert A. Dahl)의 주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유린한 국정원 사건에 대한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 국민의 목소리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통치자가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지는 과정이 빠져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럴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국정원 게이트의 시작과 끝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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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뜻을 대변해야 할 대의정치가 실종되었다. 헌법가치를 준수하고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 이처럼 대의정치가 불법적으로 부당하게 왜곡되어 현실에서 나타난다면 이에 맞선 국민들의 정치행위는 직접민주주의로 표출될 수 밖에 없다.
■ 책임정치의 실종, 결국 국민은 촛불을 들 수 밖에 없다
국민들은 국정원 게이트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국정조사 및 청문회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대통령의 사과와 관련자 처벌 및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회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대통령에게 헌법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새누리당은 국정원 게이트를 밝혀내기 위한 국정조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결사적이었고 민주당은 너무도 무기력했으며, 대통령에게는 민주주의적 가치보다 정권유지 및 체제유지가 더 중요했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정잼들은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는 대리인들이 모여있는 국회에서 논의되고 해결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취지에 부합한다. 그러나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인 국회가 사회적 제반 갈등을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제도권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제 공은 제도권 밖, 즉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광장정치로 넘어가게 된다. 이것이 국민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 된 이유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은 촛불에 담겨있는 의미를 단순히 대선결과에 불복하는 '좌파세력'들의 선동이요, 반의회주의적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은 다수 국민들이 의회와 대통령의 책임정치를 요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국민의 뜻을 대변해야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21세기의 시대적 흐름과 부합하는 자발적 정치행위이다.
진보·좌파정권이었던 참여정부 시절에도, 보수·우파정권이었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국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이 다수 국민의 합리적 민의에 반하거나, 민주주의에 역행할 때 국민은 이에 대해 언제든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한 촛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이다. 촛불은 주권재민의 헌법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에게 보내는 국민들의 준엄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