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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씨(蘇我氏)는 고대 일본의 귀족이였다.백제인이였던 소가씨는 불교도입에 적극적이었다.
킨메이 천황(欽明天皇)조정에서 권력다툼을 벌인 가문은 소가(蘇我)씨와 모노베(物部)씨였다.
두 가문의 투쟁원인은 538년 백제(百濟)에서 전해진 불교 문제였다. 불교 지지파는 조정 내에서도 단 한사람 소가씨밖에 없었다. 당시 소가씨는 힘이 미약해서 불교가 배척당하는 동안에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모노노베(物部)씨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소가씨는 쇼토쿠(聖德)태자와 협력하여 일본 최초의 사원인 아스카지(飛鳥寺)를 건립하였다. 아스카, 나라시대 일본의 사원들은 백제인 등 한반도 이주민들의 기술로 지어졌다.
소가씨(蘇我氏)는 소아만지(蘇我満智)가 그 정점에 서 있는데, 그는 왜조정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백제계인 아야(漢)씨도 재물을 관리했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소가씨의 권력장악아래 있었다. 소가씨는 주로 재정과 외교 문제를 담당했으며 중국과 한반도의 움직임에 민감하였다.
아스카 시대 6세기가 되자, 호족인 소가씨는 천황들을 교체할 만큼 권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이 소가씨와 손을 잡아 정권을 차지한 인물이 성덕태자다. 성덕태자는 여황제 스이코 천황(推古)을 도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가의 시스템을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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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들을 교체할 만큼 일본을 100년간 지배한 소가씨의 시조는 백제장군 목라근자
일본 교토 부립 자료관에『상궁성덕법왕제설』이라는 서기 7세기 당시 일본 사정을 기록한 책이 남아 있는데, 이 책에는 "소아씨가 원래는 임(林)씨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해설자는 ‘『신찬성씨록』에는 “임(林)씨는 백제국(百濟國) 사람인 목(木) 귀공(貴公)이다.”는 구절이 나온다. 소아씨는 무엇 때문에 성을 목씨에서 임(林)씨로 바꾸었을까? 그리고 왜 마지막에는 성을 소아씨로 바꾸었을까?
목협만치는 백제에서 태어나 일본열도로 건너간 뒤 성을 ‘소아’씨로 바꾸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소아만지가 정착한 곳으로 알려진 땅은 일본의 나라 현 가시하라 시 소가(한자로는 증아曾我. 소아蘇我도 일본식 발음으로는 ‘소가’라고 읽는다) 정(町)이다. 이것이 “지명을 바탕으로 한 호족의 성(스즈키 야스타미 교수. 가쿠슈인대학).”이라면, 목협만치는 소가정에 정착했기 때문에 ‘소가정에 사는 집안’이라는 뜻으로 소아씨라고 불린 게 아닌가 한다.
그러나『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475년 문주왕과 함께 백제의 웅진 천도를 지휘한 인물이 목협만치다. 다시말해『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을 믿는다면 목만치는 서기 475년까지는 목(목협)이라는 성을 쓰고 있었고 소아라는 성은 쓰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목만치는 “백제인 대 망명기인 400년경(『네티즌과 함께 풀어 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이하『네티즌 고대사』)”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본국에서 달아나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노인이 된 서기 475년(71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백제 본국을 재건하는 일에 힘썼지만, 2년 후인 서기 477년(73세)에 왕위를 둘러싼 내전에 휘말려 곤지(여곤)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네티즌 고대사』․『삼한사의 재조명』․「삼국사기가 기록한 목협만치의 출생」참조).
목라근자의 아들이였던 목만치(木滿致) 또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는 백제의 대신이다. 목만치는 목라근자(木羅斤資, 모구라곤시)가 신라를 토벌할 때, 신라가 바친 여인을 취하여 낳은 자식이다. 목협만치는 그 아버지의 명성과 공로에 의지하여 임나(대마도)를 통치하였다. 본국 백제와 왜를 오고 가면서 왜왕실에 백제문화를 전하였고, 백제에는 왜의 군대를 지원하였다. 왜왕실를 100년간 장악하였다. 소가씨의 권세를 당할 자가 없었다.
한성으로 남침해 온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에게 개로왕이 살해(475년)당하던 해에,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목만치에 대한 기록은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목협만치와 성만 다를 뿐 이름이 똑같은 소가노 만치가 이후 일본 역사서에 등장한다. 즉, 어떤 이유로든 일본 열도로 건너간 목협만치가 그 곳에서 기반을 잡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소가노 마치를 목만치와 동일인물로 보고 소가 가문을 백제계 도래인으로 보는 설에 따르면, 목만치는 왜로 건너와 왜조정의 조신이 된 인물이다. 목만치는 백제 왕족들이 살던 백제강 일대의 이시카와(石川)에 자리잡고 성씨를 '소가'로 바꾸었다.
목협만치의 아들이나 손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에 고향을 잃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로 달아나야 했다.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백제(삼한백제)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었다.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붙잡혀 가고, 달아나다가 죽고, 살아났다 하더라도 피난민으로 가득 찬 식민지에서 힘겹게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고구려에 의해 수도 한성이 초토화되어 백제 중앙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엄지(담로주)들은 지방 군벌이 되어 서로 싸웠다(「일본열도 안에서 고전한 삼한백제의 망명정부」참조. 카테고리는 [백제사]). 아버지(할아버지) 목협만치는 본국 백제의 중앙정부를 다시 세우려고 늙은 몸을 이끌고 백제로 건너가서 일하다가 또다시 내전에 휘말려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들이 바라는 건 무엇이었을까? 자기 세대에는 - 또는 자기 자식이나 손자의 세대에는 - 전쟁이 일어나 난민이 되거나, 고향에서 쫓겨 나거나, 내전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집안이 번창하기를 빌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자신의 성과 이름을 ‘번창’, ‘번영’을 뜻하는 말로 바꾼 것은 자연스럽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임(林)이라는 한자뜻을 살펴보면 그런 추측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임(林)은 1. 숲 2. 모임, 집단) 3. 많다 4. 임금, 군왕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임(林)을 뜯어보면 목(木)자가 두 개 모인 모양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나무가 늘어나서 숲이 되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목씨들은 한자의 뜻을 취해 ‘나무가 늘어나서 숲이 되듯이, 우리의 자손들도 늘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성을 임(林)씨로 바꾼 건 아닌지(임林이라는 한자 자체에 ‘많다’는 뜻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임’이라는 성씨 대신 정착한 지역의 이름이자, 근거지의 이름인 ‘소아’라는 말을 더 많이 부르면서 ‘소아’가 성으로 굳어진 것이라과 봐야 할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목만치가 성을 바꾸었다는 것은 한성백제가 몰락한 이후『삼국사기』와『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인들의 비극적인 삶을 입증해주는 간접적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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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만치(소가씨) 가족관계]목만치의 아버지는 근초고왕 시기 백제 장군 목라근자
[일본서기]《백제기에서 인용된 부분은 신공기 62년조, 응신기 8년 봄 3월조와 25년조, 웅략기(雄略紀) 20년조이다. ""그리해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詭)【이 두 사람은 그 성씨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의 장군이다.】 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보냈다.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 " 《백제기》의 내용상 성격은 근초고왕 시기 활발했던 백제와 왜의 통교라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근초고왕의 남3한정벌에 왜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방송내용]암살당한 후 몰락한 소가씨, 암살배경은?
645년 6월 12일, 왜 아스카 판개궁에 자객이 난입했다. 칼은 단 한 사람을 노렸다. 그는 소아입록(蘇我入鹿), 조정 최고 실력자였다.
천황의 어전에서 일어난 희대의 살인사건. 그러나 그가 죽자 한반도 정세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고대 일본 최고의 권력자는 한반도와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고대 일본의 수도 아스카. 일본 최초의 국가가 싹튼 고대 문명의 발상지다. 이곳에 특이한 무덤이 있다. - 이노쿠마 카네카트 ㅣ 다시바나 대학 명예교수 - “이곳은 일본에서는 오륜탑이라 불리는 것인데요. (소아)입록의 머리입니다.”
다섯 개의 돌을 쌓아 만든 무덤. 1400년 전 일본 황궁에서 살해당한 소아입록의 머리가 묻혀있다고 전해진다. - 이노쿠마 카네카트 ㅣ 다시바나 대학 명예교수 - “소아입록(蘇我入鹿)이 이곳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암살당합니다. 소아입록은 당시 최대 권력자였습니다. 그가 암살당했을 때 잘린 머리가 날아 와 이곳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살인사건은 일본 역사 최대 정치개혁인 대화개신의 서막이 된다. 아스카 인근의 한 신사. 이 곳에 당시 사건을 기록한 그림이 있다. - 무로하라 요시카츠 ㅣ 사무국장 - “이것이 다무봉연기회권(多武峰緣起繪券) 입니다. 대화개신을 중심으로 신사와 관련이 있는 장면을 방문객들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 이곳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었던 살해사건. 그림에는 사건 당일의 정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살인은 천황의 어전에서 일어났다. 두 명의 자객이 번갈아 휘두른 칼에 소아씨는 목이 잘려나갔다.
살해사건이 일어났던 아스카 판개궁. 지금은 건물의 터만이 남아있다. 바닥에 깔린 도석은 이 곳에 최고급 건물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황궁의 한 가운데 위치한 어전. 1400여년 전 그 날, 이곳에서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 천황의 주재로 외교문서를 보고하는 자리. 소아입록은 국서가 낭독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 때, 무장을 한 두 명의 자객이 나타났다. 그들은 어전에 난입해 소아입록의 어깨와 머리를 베었다. 그것은 최고 권력자를 향한 쿠데타였다. 소아입록이 살해된 후, 소아씨의 가문은 몰락했다.최고의 권력자에서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소아씨.처참하게 살해당한 아들을 보고 충격에 빠진 아버지는 집을 불태우고 자살한다.
현장에 있던 한 목격자가 소리쳤다. [일본서기]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사람(신라인)이 그를 죽였다."
그의 죽음은 한반도 정세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백제인 소아씨는 왜 천황궁에서 이처럼 처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 /내용출처:KBS방송프로그램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는 고구려.백제.신라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고, 고구려와 백제와 돌궐은 대당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 때 왜조정에서는 백제계와 신라계와 당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정쟁이 벌어지게 된다.
백제계는 당연히 백제노선을 따를 수 밖에 없었고, 신라계는 신라노선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신라계로써는 왜왕실와 도모하여 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소가씨를 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왕실에 무기를 소지하고 들어갈 수 없다는 왕실법도에 따라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던 소가씨는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가씨가 살해된 후 왜왕실은 신라와 친교를 도모하며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신라사신으로 김춘추가 왜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왜의 천황은 모두 백제왕족이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연개소문같은 소가씨의 독주와 독점을 천왕가로써는 제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신라계와 손을 잡고 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정치적 명분을 내세워 제거했다고 볼 수 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후 일어난 백제부흥전쟁에 왜왕실이 적극적으로 의자왕의 누이동생인 사이메이 천황과 아들 천지천황이 적극 도와준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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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87~188쪽. ISBN 8901047519 “목만치라는 인물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백제기』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백제기』에 이른 바에 의하면, 목만치는 목라근자(木羅斤資, 모구라곤시)가 신라를 토벌할 때, 그 나라의 부인을 취하여 낳은 자이다. 그 아버지의 공에 의지하여 임나를 오로지 마음대로 하였다. 우리 나라(백제)에 와서 귀국(왜)에 오고 가고 하였다. 천조(왜)의 제도를 계승하여 우리 나라 정치를 장악하였다. 권세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천조(왜)에서는 그의 폭정을 듣고 소환하였다.”
↑ 《일본서기》, 응신기 25년조,〈廿五年,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王年幼, 大倭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婬,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討新羅時, 娶其國婦而所生也. 以其父功專於任那, 來入我國往還貴國. 承制天朝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皇聞其暴召之.』】〉
↑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
↑ 남쪽을 "웅진" 또는 "일본"으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뉘나 지금의 공주인 웅진성으로 해석하는게 방향적으로도 맞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 정윤미 (2011). 《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시루, 31쪽. ISBN 9788996649328 “비상시국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주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린다.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바로 목협만치(木劦滿致)였다. ...말 그대로 문주왕은 목협만치를 남쪽으로 보냈고 그가 향한 남쪽은 바다 건너 섬나라, 즉 일본을 뜻했다.”
↑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84쪽. ISBN 8986361558 “소가노의 증조부는 백제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서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라고도 함), 일본에서는 소가노 만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개로왕(蓋鹵王) 21년 (475)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목협만치가 개로왕의 아들 문주와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84쪽. ISBN 8986361558 “그러나 목협만치에 대한 기록은 웅진 천도 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목협만치와 성만 다를 뿐 이름이 똑같은 소가노 만치가 이후 일본 역사서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든 일본 열도로 건너간 목협만치가 그 곳에서 기반을 잡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74~75쪽. ISBN 8986361329 “소가노 우마코의 고조부는 백제 개로왕 때의 대신인 목만치(木滿致)다. 목만치 대신은 개로왕이 한성으로 남침해온 고구려 장수왕의 군사들에게 살해당하자 개로왕의 왕자인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을 등극시킨 뒤 왜로 건너가 왜 조정의 조신이 된 인물이다. 목만치는 백제 왕족들이 살던 백제강 일대의 이시카와〔石川〕에 자리잡고 성씨를 '소가'로 바꾸었다고 카도와키 테이지는 밝히고 있다(門脇禎二, 『飛鳥』, 日本放送出版協會.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