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그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오히려 점점 더 뜨거워지고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6월 말 불을 밝힌 촛불집회는 한 여름 장마비와 폭염을 뚫고 사람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그리고 처음 몇 백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는 급기야 10일 오후에는 서울광장에만 5~6만명(경찰 추산 1만6000명)의 시민들이 모였고, 전국적으로 10만 인파에 달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다. 이는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래 최대인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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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서울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지난 대선에 국정원이 자행한 불법대선개입을 규탄하고, 책임자 처벌 및 국정원 개혁,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난 민심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먼저 새누리당은 촛불민심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대규모 장외집회를 펼치고 있는 민주당을 향해 공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구태정치'로 규정하면서 민주당이 민생과 각종 현안을 외면하고 있다는 측면을 적극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 밖에 있는 민주당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심산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보다 한술 더 뜬다. 아예 이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이 사안과 관련한 박 대통령의 발언은 고작 국정원 스스로 '셀프개혁'을 하라는 것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그 외에는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전국적으로 10만 여명의 국민들이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을 규탄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다.
국정을 책임져야 할 대통령은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고, 궤도를 이탈한 민주주의를 다시 정상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기나긴 침묵이 오히려 의혹을 가중시키고, 민주주의를 더욱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넣고 있는 형국이다. 대통령의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 필자는 촛불집회에 담겨있는 민의를 외면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을 들여다 보려한다.
비록 대통령이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의혹과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촛불집회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최근의 행보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 저도의 추억? NO, 유신의 추억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지 벌써 6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이 기간동안 국정은 꼬일대로 꼬여만 갔다. 거듭된 인사파동, 정부조직법 개정안 파문, 남북관계 파탄, 방미외교중 윤창중 성추행, 국정원 사건 및 촛불집회, 최근의 졸속 세법개정안 파문까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마치 이명박 정권의 임기 초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이로 인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은 갈수록 실망으로 변해가고 있고, 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내세웠던 국민대통합은 국민분열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당연히 국정을 책임지는 최고책임자로서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비켜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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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휴가 복귀 이후 청와대 비서실장을 포함한 4명의 수석비서관을 교체했다. 이 개각에서 단연 화제가 되었던 인물은 김기춘 비서실장이었다. 흔히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복심이라 일컫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의중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비전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또한 국정현안에 대해 대통령에 앞서 사전정지작업을 해야하는 자리이니만큼 남다른 통솔력과 행정부 장악능력 역시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고단한 현실을 회피하고 싶을 때 인간은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그런면에서 박 대통령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박정희 유신시대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삶을 살아온 백전노장 김기춘은 거듭된 악재에 국정운영 동력의 상실을 우려한 박 대통령이 과거의 기억을 통해 불러낸 신화적 인물이며, 박 대통령에겐 행복했던 유신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추억 속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욕구를 현실에 반영해 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중심에 있는 박 대통령의 선택은 변화가 아닌 과거로의 회귀였다. 과거로의 회귀, 이는 달콤한 유혹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다. 국민의 시선은 이미 먼 과거의 지점이 아닌 다가올 미래를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과거의 기억은 추억으로 자리매김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떠올리기 싫은 악몽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졸속 세법개정안 파문, 황급히 무마시키는 속내
최근 정부가 발표한 세법개정안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박 대통령이 직접 수습에 나섰다. 다른 시국 현안에는 침묵하거나 말을 아끼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례적으로 대통령이 나서는 까닭은 이 사안이 촛불민심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민감한 사안인데다 그 중심에 30~40대 직장인들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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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국정원 사건에 대한 촛불민심은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방송과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받고 있는 촛불집회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것은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이 사건에 임하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비상식적 대응방식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결과에 불복한 불순세력들이 촛불집회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상 규명에 미온적이고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새누리당과 박 대통령의 태도가 촛불집회의 주된 동력이 된다.
빛보다 빠르게 원점에서 재검토를 지시했던 세법개정안의 경우처럼 박 대통령이 신속하게 국정원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대국민 사과를 했더라면 정국은 지금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난 촛불민심에 기름을 붓는 졸속 행정에 화들짝 놀란 박 대통령의 세법개정안 재검토 지시는 매우 위선적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 대통령이 침묵은 의혹만 키우는 격
박 대통령은 정부조직법 파행과 이번 세법개정안 파문에 이례적으로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전자는 임기 초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서, 후자는 촛불민심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둘을 제외하면 그 어떤 파문과 파행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입은 자물쇠처럼 굳게 잠겨져 있다. 참으로 자의적이고 편리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해 12월 14일 당시 박근혜 후보는 "국정원 댓글 증거가 있으면 민주당은 제출하라"고 민주당을 향해 거세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후 검찰의 수사 결과 국정원이 민간인까지 동원해 국내정치와 대선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물론 새누리당 역시 국정원과 깊숙이 관계되어 있음도 드러났다. 설사 당시에는 몰랐다 하더라도 모든 정황이 드러난 지금 상황은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박 대통령은 설마 국정원의 불법선거개입 사실마저도 부정하려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항상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박 대통령은 '신뢰와 원칙'이 행위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 언제든 가변적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해야만 한다. 작금의 박 대통령에게는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사상 최악의 국기문란사건으로 기록될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과 이를 규탄하는 촛불민심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박 대통령의 모습 그 어디에서도 신뢰와 원칙은 커녕 최소한의 상식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더 이상 사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모든 국민의 눈은 지금 박 대통령의 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만 한다.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