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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항상 역사정신의 맥을 알고 있는 소수의 영웅들에 의해서 흘러 왔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창조적 소수”라고 하였다.
해(한)민족 역사에도 항상 위기 때마다 나타나서 민족의 앞길을 연 인물들이 있었다. 오늘의 조의선인은 한민족 역사의 이상을 이루고, 인류문명사의 열매를 맺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홍익인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코리아의 호걸 연개소문 그는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 [한단고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로운 기운이 높아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 하였다.”(儀表:몸가짐이나 예절을 갖춘 태도/ 雄伟:웅장하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여기서 ‘조의선인’이란 말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핵심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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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영웅 연개소문)선제공격으로 당태종의 오만을 꺽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연개소문은 당나라 사신 앞에서도 할 말을 다 하였으며, 당나라를 증오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하고 겨레를 해치려는 것을 소인이라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편]
<<2년(643) 봄 정월에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중략)
가을 9월에 신라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백제가 우리 나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 합니다.“ 라고 말하고,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3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내렸다.
“신라는 우리 왕조에 충성을 다짐하여 조공을 그치지 않으니,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명년에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상리]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두 성을 깨뜨렸는데, 왕은 사람을 시켜 불러 들여서 [연개소문이] 돌아 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개소문은 [상리]현장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신라와 원한으로 틈이 벌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전에 수나라 사람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신라가]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상리]현장이 말하였다.
“기왕의 일을 어찌 추구하여 논의하겠느냐?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것을] 걸고 넘어지지 않는데, 고구려만 어찌 (신라가 차지한) 옛 땅을 반드시 찾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막리지는 사신의 말을 수용하지 않았다.>>
[한단고기]기록 그대로 고구려 연개소문의 기상이 엿보이는 삼국사기 기록내용이다.
그리고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다."는 당나라 사신의 말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한나라가 위만조선이 망하자 차지하고 설치한 한군현 지역은 본래 단군조선의 서쪽 영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혈투를 벌이는 사이를 이용하여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의 영토를 토해내라는 연개소문의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다.
당시 동북아 관계는 당의 팽창에 대응하여 고구려와 백제와 왜와 초원세력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고, 당나라와 신라가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다.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당나라 중심의 천하통일을 꿈꾼 당나라에 대한 대연합 전선에서 오로지 강대국과 대세에 눈치빠르게 의존하는 신라만이 배신을 한 셈이였다. 그 신라의 배신으로 인하여 동아시아 질서가 중국중심으로 넘어 갔고, 증오에 찬 백제인들의 열도 이주로 탄생한 일본의 줄기찬 침략야욕은 지금의 한일악연이라는 질곡의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이르기를, 백제 성충도 동의한 바, 그간 삼국의 원한을 씻고 삼국이 힘을 모아 오랑캐 당나라를 정벌하고 영구히 불가침 맹약으로 삼국이 중국을 통치하자고 재삼 제안했으나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았다."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태종 이세민의 전쟁 설화와 유적이 산동지역에 남아 있다. 당태종 이세민을 구한 김걸이라는 자는 신라장군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진덕여왕 시기에 이미 당나라의 연호와 관제를 사용하며 당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한 신라가 충성의 차원에서 당나라에 파견한 장군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태종 이세민의 오만을 응징하기 위한 연개소문의 선제공격에 해당하는 산동성 마산전투
산동성 청도 인근 ‘즉묵시’ 서쪽에는 233미터의 마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643년에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이 향토지에 기록되어 전해 온다.
당태종이 643년 산동성 마산전투에서 연개소문에 포위되어 사로 잡힐 처지에 놓이자, 김걸(신라장군 ?)이 당태종을 구출하나 마산전투에서 김걸은 연개소문에 대항하다 전사한다. 즉묵(卽墨)마산(馬山)은 해발 233미터로 즉묵의 서부 평원에 유일하게 우뚝 선 고산이다.
청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에 실려 있는 기사에 따르면 "당조 정관17년(643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그 군주를 살해하고 스스로 나라의 군후(君後)가 되어서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海)를 건너(渡海) 즉묵지방을 침범했다."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권력을 차지한 후에 굴종을 요구한 수나라 문제에 대해 말갈 기마군을 동원하여 육지로는 요하를 건너 영주를 선제공격하고, 바다로는 연개소문 아버지 연태조가 지휘하는
수군을 동원하여 수나라 수군기지인 래주를 공격하여 영주.래주 총관(군 총사령관)을 참살하여
수나라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고구려 영양태왕처럼 연개소문도 수군을 동원하여 발해만을 건너 산동지역을 선제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마산전투에서 당태종이 이끄는 당군이 패배하였고, 위기에 빠진 당태종을 신라장군으로 추정되는 김걸이라는 인물이 구해내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야만 하는 신라에게 임금은 당태종 이세민이였던 것이다. 후에 사람들은 당태종을 구한 김걸을 생각하며 단산(團山)을 장군봉으로 불렀다. 원나라 시기에 조정에서는 충용왕(忠勇王)으로 책봉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기리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의 연개소문이 머물렀던 마산 골짜기는 대왕구(大王溝)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명.청시대에 산 위에 사당을 지어 "대왕묘(大王廟)"라 했다. 연개소문을 고구려의 대왕급의 인물로 높이 떠 받든 것이다. 보장왕 3년(644년)에 당태종 이세민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빌미로 침략해 왔다. 그러나 당군이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3개월에 걸친 치열한 공격에도 성을 빼앗지 못했다. 당군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에 연개소문이 말갈병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단행하자 당군은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못내고 퇴각했다. 퇴각하려는 와중에 안시성에서 달아 온 화살에 당태종의 왼쪽 눈알이 박혀 실명해 버린 일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때 당군이 얼마나 퇴각을 서둘렀는지 좋은 길을 놔두고 진흙수렁으로 요하 하류 요택에 길을 만들어 건너야할 정도였다. 당시 당태종 스스로도 나뭇단 묶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이처럼 급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마르칸드까지 사신을 보낼 정도로 연개소문의 초원외교가 열매을 맺어 초원세력 연살타의 당나라 공격과 함께 병법의 고수였던 연개소문의 전략에 빠져 배후를 공격당하고 퇴로를 차단당하는 등 큰 위기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당태종은 원정실패에 깊이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한단고기]태백일사는 연개소문이 당태종 이세민의 뒤를 계속 추격하여 당나라 장안 인근 용도성(桶道城)에 1군단을 보내 당태종을 계속 추격하자 궁지에 몰린 당태종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구걸하였다.
그리고 649년 당태종이 52세 나이로 숨을 거둘 때, "다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겼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는 당시 고구려군의 장안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막리지는 추정국, 양만춘 등 수만 기를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치고 피리 부는 취악대를 앞세워 장안에 입성하였다. 이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을 하였는데,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의 전 영토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삼국사기』에도 “고혜진이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惠眞竟至長安)”고 하여 고구려 장수 고혜진에 의한 당 본토공략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은 "중국을 위하여 수치를 숨긴다."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의 역사기술로 모두 숨겨놓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그러니 중국 문헌내용들을 분석할 때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안 되고, 한.중.일 사료비교분석을 통하여 그 진의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657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의 묘소가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峯山)에 있다."고 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혁명가의 기백과 재략은 갖췄으나, 조선 만대의 행복을 꾀할 수 있을 현재(賢才)에게 대권을 물려주지 않고 불초한 아들에게 넘긴 것을 보면 야심은 많으나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코리아를 중국 당나라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낸 영웅임을 분명한 사실이고, 강소성 지역의 몽룡탑 전설(연개소문에 쫓기던 이세민이 숨은 우물터로 이세민이 공로탑을 세움)이 증명하고 있듯이 연개소문이 당태종 이세민을 추격하여 장안성에서 항복을 받아내고 본래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번한땅)이였던 중국 동해안 지역을 약정서로 받아낸 건 명백히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이 코리아(고구려)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하며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날조하는 이유가 바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의 100만 대군의 침략을 물리치고 결국 수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중국사의 최고 임금으로 평가받는 당태종 이세민의 침략을 물리치고 눈알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는 치욕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자랑스러움이든 치욕이든 있는 그대로 기술되야 하는 것이다. NLL대화록을 폐기하고 삭제한다고 해서 그 진실이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새누리당이 대화록 유실에 대하여 검찰에 고발을 했다고 한다. 민주당의 김한길 당대표도 기자회견을 통해서 검찰수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대화록 사료가 폐기 삭제되었다면 그 주범들은 누구이고 무슨 목적인지가 선거에서 심판권을 가진 국민적 관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참고서적
[환단고기(桓檀古記)]태백일사(太白逸史)」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
신채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 『독사신론(讀史新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