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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손 코리아(고구려)의 하늘아래 위풍당당한 골본성(오녀산성)
여러 부족이 합해져서 지중해를 지배하는 지중해 제국으로 그리스가 성장했듯이 고구려 또한 5개 부족이 합해져 동아시아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제국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부족회의를 통한 민주적인 합의가 중시되었다.
전문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적인 동방의 유일한 수비 성(衛城)으로써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견줄 수 있다고 한다.
고대 도시국가의 중심지에 있는 언덕을 의미하는 아크로폴리스는 지금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시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수비성으로서 동서 270m, 남북 150m, 서쪽의 입구를 제외하고 다른 3방향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인공을 가미해 성벽을 쌓고 방어의 거점으로 삼은, 신전(神殿)과 현문(玄門) 등이 두루 갖추어져 있는 세계에 이름난 옛 성이다.
궁궐터와 군사요새가 발굴된 오녀산성도 수비하기 알맞고 왕궁과 도읍의 시스템이 완벽한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로서 그야말로 동방의 아크로폴리스에 손색이 없다. 우리는 2000여 년 전에 이러한 산세를 선정하여 성을 쌓아 천혜의 요새를 만든 고구려인의 슬기와 지혜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광개토태왕비]"추모왕(고추모)은 천제지자(해모수의 손자)...홀본 서쪽산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정했다."
오녀산성은 고구려가 일어난 환인(골본)에서 8.5km 떨어진 오녀산에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 고추모가 개척한 고구려의 발상지이며, 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이다. 이 산성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 3년 고추모의 아들 유리왕이 도읍을 국내성(집안)으로 이전할 때까지 40년 동안 고구려의 초기 수도로 유지되었다.
요녕성과 길림성에 아직 남아 있는 100여 개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오녀산성은 보존 상태가 가장 좋고 규모가 크며 성읍의 체계를 두루 갖춘, 세계에서도 특이한 축성술을 자랑할 만한 산성으로서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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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요녕성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오녀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한 뒤부터 지금까지 발굴과 연구·보호사업이 끊이지 않았다.하지만 20세기의 80년대 초반까지도 고고학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유물 파악의 부족으로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어느 산성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오녀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1985년 6월, 환인현에서는 국무원 산하 문화부 관련 부서의 허가를 받고 오녀산 위에 텔레비전 송신탑을 세웠는데 이 탑 주변의 역사유물을 정리하고 발굴하기 위해 환인현과 본계시, 요녕성 문화재 관계부서가 공동으로 고고발굴단을 구성, 이듬해 5월부터 3개월 동안 오녀산성에 대한 발굴을 진행했다.
1천여㎡에 달하는 면적을 발굴한 결과, 한나라와 금나라 시기의 유물과 함께 고구려 시기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됐다고 발표하였다. ‘오녀산성이 바로 고구려의 홀승골성(紇升骨城)이다.’ 고증(考證)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이 홀승골성이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라고 확인하였다.
오녀산성 발굴의 진척에 따라 오녀산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리도 점차 강화됐다. 1994년, 요령성 정부에서는 오녀산 풍경구를 성급 풍경구로 지정하고, 그 이듬해부터 환인현 정부에서는 순차적으로 오녀산풍경명승구관리처와 오녀산산성 관리처 등 전문 부서를 설치하고 오녀산성의 복원사업을 비롯한 전체 풍경구의 개발과 관리를 전면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이리하여 오녀산성은 1996년 11월에 국가급 중점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2년에는 국가급 관광지역으로 지정됐으며, 2004년 7월에는 길림성 집안(集安) 고구려왕릉 및 귀족묘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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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역동적인 코리아, 그들에게 거리와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모본왕 편]"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태조왕 편]"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하였다.."
[광개토태왕비]"토욕(감숙성)을 정벌하였다..그 때부터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북위 압박용으로 토욕정벌..북위가 수도천도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광개토태왕 시기]"백제.신라.거란.왜가 조공했다..평량(감숙성)까지 평정되었다..이 때가 해동의 극성기였다.."
고구려가 과하마을 타고 요하를 건너 중원대륙과 감숙성 지역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기마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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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집단과 한나라가 부여 서쪽 변경을 침략할 때 대홍안령산을 넘어 북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 동명왕 고두막이 태어난 나라이름이 북만주 흑룡강 지역의 고리국이라는 문헌<논형.한단고기>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고구려 전성기 장수태왕 시기에 고구려가 유연과 모의,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려 했다는 기록 (위서 거란전 太和三年高句麗竊與謀...欲取地豆于以分之)이나 거란부족 일부를 고구려가 지배했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고구려 성터가 남아 있는 내몽골 지역도 넓은 의미의 고구려 세력권에 해당하는 곳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징기즈칸 코리족의 '코리',중국 문헌<논형>에 나오는 부여 동명왕(고두막/소서노 할아버지)의 탄생지인 북이 '고리국'같은 고구려의 기원 문제, 혹은 고구려.대진국 멸망후 일부 부여 유민집단의 초원이동같은 문제까지 유기체적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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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험준한 산악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을 정교하고 튼튼하게 잘 쌓았던 고구려인들은 오늘날 코리아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퍼져 살면서 정치경제문화를 리드해 가고 있듯이 베링해협을 통하여 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아메리카 환경에 적응하여 살면서 코리아 문명을 건설했다.
그들이 남긴 문명이 압록강 지역의 적석총 양식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한 남미 맥시코의 아즈텍 문명이다. 아즈텍은 <밝은 땅>이라는 의미의 아사달을 의미하는 말이다. 무덤들의 방향이 서북쪽 지역으로 고구려가 일어난 압록강 지역과 백두산을 향하고 있다.
맥시코라는 국가명은 '맥이고'로 맥족은 고씨족이라는 의미다. 광개토태왕비문에도 고구려는 맥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맥시코는 아메리카로 이주한 고리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아메리카를 침략하여 인디언들의 수 많은 황금들을 강탈하고 황금채굴에 인디언들을 노예로 부린 백인종과 많이 혼혈화되어 전통적인 모습들이 많이 사라졌으나, 당시에는 고구려 풍습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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