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보기관이 직접 뛰어든 것은 주인에 대한 배반이며 국가에 대한 반역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국정원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김대중 대통령이다. 정치인 가운데 정보기관의 탄압을 가장 많이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하자 '안기부'의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꾸고 절대로 국내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국정원의 원훈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꾸었다.
어두웠던 과거의 이미지를 떨치고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의 증대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가던 국정원이 이명박 정부 5년을 거치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북한에 특사로 갔던 분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대화하는데, 김위원장이 자신이 만나본 남쪽의 역대 안기부장들을 일일이 평했다. 그중에 K모 부장을 '참 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몇해 전 남쪽의 총선을 앞두고 우리 군대에게 돈을 줄테니 판문점에서 중화기를 흔들어 달라고 주문을 했었다"고 남쪽 특사에게 말했다.
앞에서는 제압해야할 적대의 대상인것 처럼 행동하고 뒤로는 그런 북과 추악한 거래를 해온 적대적 공생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김위원장이 이를 발설한 것은 이른바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이 자기와 무관하게 아랫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변명하는 의도로 읽혔다.
실제 1996년 15대 총선 직전 판문점에서 북한군의 무력시위 사건이 발생했고, 정부 여당은 이를 이용해 보수층을 결집시켰고 선거에 승리했다.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 역사는 질기고 길다.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역대 대선 때마다 용공 조작과 북풍 사건은 한번도 거르지 않고 터졌다. 민주 정부 10년이 예외였을 뿐이다.
작년 말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닮았다. 인터넷이 여론지형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국정원 사건은 'IT 3.15'라고 부를만 하다. 3.15는 전국적으로 공무원과 경찰을 부정선거에 동원했고, 이번에는 국정원 직원들을 동원했다.
3.15는 4.19 혁명을 통해 단죄되고,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내무장관 최인규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번 국정원 댓글공작의 책임자인 원세훈 국정원장은 기소됐으나 아직 그 뿌리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뿌리와 관련해 며칠 전 전국 대학의 역사학자들은 "국정원의 불법과 정치공작의 근원에는 권력을 사유화해 정략적으로 이용한 전 대통령 이명박이 있는 만큼, 그를 원세훈과 함께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시국성명에서 밝힌 바 있다.
국정원의 댓글공작은 작게는 실정법 위반이고 크게는 헌법 파괴 행위다. 국정원법 9조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거나, 그런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찬양, 비방, 유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위반하면 징역 5년 이하에 처하라는 벌칙 조항도 있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정확하게 국정원법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법을 지켜야할 책임자가 앞장서 법을 짓밟았다. 이걸 방치하고 어떻게 법치국가를 운영해 갈수 있겠는가.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국가 안보를 지켜야할 기관이 명백하게 국민 주권을 훼손했다.
공화국은 무엇인가? 왕국의 반대 개념이 공화국이다. 왕국은 왕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공화국은 국민 모두가 주인인 나라다. 주인인 국민이 권력을 위임하기 위한 절차로 치르는 선거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보기관이 직접 뛰어든 것은 주인에 대한 배반이며 국가에 대한 반역이다.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누가 봐도 대선 개입 공작을 덮기위한 정치 공작으로 보인다. 대선 개입도 모자라 정치 개입까지 버젓이 저지르는 국정원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을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세계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신문은 "한국의 국정원이 정치적 앞잡이가 돼 보수파의 목적을 위해 활동하고 당파적 분열을 키우는데 권력을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세계가 보는 눈이다.
대학가의 시국선언과 거리의 촛불로 나타나는 도도한 민심은 민주 공화국을 지켜내겠다는 주인 의식의 발로다. 사실 현정권과 국정원 사람들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무임 승차한 사람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직하게 근본적 대응책 마련에 나서지 않을 경우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