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1. 한민족과 강대국 중심의 세계: ‘남북한 협력’은 생존과 번영의 길
우리민족은 5천년 역사에서 분단의 시기와 통일된 시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있었고,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통일하고 북쪽 옛 고구려 영토에 발해가 들어서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신라 말기에는 후백제, 후고구려가 일어나 다시 후삼 국시대를 경험했다. 고려가 다시 통일을 해서 우리는 통일 민족으로 1천년 이상을 지내왔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다시 남북한으로 분단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민족이 통일을 이룩하였을 때는 강력한 국력을 보유했고, 평화를 바탕으로 뛰어난 우리의 문화를 꽃피웠다. 반면, 분단을 겪고 있을 때는 상호 대결과 전쟁으로 인해 국력은 낭비되고 항상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을 걱정해야했다.
해방 후 귀국한 서재필은 1947년 11월 5일 조선산업재건협회서 연설하였는데, ‘조선은 인구로 보아 세계 67개국 중 13위이나 부력(富力)으로는 끝에서 첫째 아니면 둘째로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래서야 인민이 잘사는 정치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서재필은 또한 방송연설을 통해, ‘조선사람들은 자신의 국토와 인구의 크기에 걸맞는 위치를 확보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서, 세계 13위만 도달하면 다른 문명화된 국민들처럼 풍족하게 살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불러 일이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분단되어 있지만, 반 토막인 남한만으로 세계 11-13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했고, 정치적으로도 경제 크기에 걸 맞는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류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우리민족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처럼 강해진 것은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처음이다.
해방 직후의 우리민족은 인구 크기로 보면 당시 세계 67개국 중에서 13위로서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으나, 경제력으로는 최하위를 면치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위상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중에 미국과 소련 등 열강들의 ‘힘의 외교’의 희생양이 되어 나라와 민족이 두 동강이 나고 또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냉전의 올가미에 걸려 지금까지 신음소리를 뱉어온 지가 벌써 60여 년이 넘었다. 거의 70년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민족이 분단되었는데도 지금까지 그것을 떨쳐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민족은 전세계에 우리 민족밖에 없다.
이제 남한만으로도 우리가 먹고살게 되었다고 해서, 통일이 되면 통일비용의 부담으로 우리경제가 당장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 비용을 과장하고, 북한을 외국 취급하고, 허다한 경우 우리민족에게 불공평하고 폭력적으로 부과되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의 영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우리 남한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민족의 운명과 관련하여 남북한이 협력하지 않고서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 분단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에서 우리민족의 통일과 자율성(독립성)을 성취해 내는 것도,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미래를 이룩해내는 것은 남북한이 함께 협력하여 노력할 때 진정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남북한에 무력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우리가 이뤄놓은 경제·정치적 위상은 그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금 우리민족이 처해있는 국제환경은 미중양국이 자웅을 거루면서 대결적 구도로 새롭게 형성해 가고 있는 21세기 동아시아질서이다. 중미양국 간의 대결적 구도는 동아시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남북한을 분리시켜 각각의 세력권에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민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엄중하다. 상호 협력하여 그러한 흡인력에 저항하고 우리민족의 공동이익과 통일을 함께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대결을 지속하여 속절없이 그 흡인력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 것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더 통일이 멀어지는 것을 보아야만 할 것인가?
우리민족의 최근세사는 외세의 침략과 민족 분단의 역사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분단과 외세의 영향에 익숙해져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또 다시 21세기 강대국질서에 속절없이 끌려들어가 피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살 수는 없다. ‘민족의 통일과 자율성의 확보’ vs. ‘민족의 분단과 강대국 질서의 추종’이라는 엄중한 선택을 앞에 놓고서 지금처럼 남북 간에 상호대결을 지속하고 무력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남북한 집권자들의 정책은 민족의 희망에 대한 배신이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남북한이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공동이익의 공간을 확립하고 확보함으로써 미중대결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질서가 우리에게 분단의 지속을 강요할 때 이를 거부하고 자주와 통일에의 노력을 통해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기약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민족이 강대국중심의 국제사회에 대해 추구하는 ‘자주’는 ‘닫힌 자주’가 아니다. 그것은 김대중대통령의 생각처럼 ‘열린 자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 되겠지만, 점진적인 협력의 과정을 통해 남북연합의 ‘사실상의 통일’부터 이뤄나간다면, 통일된 우리민족이 2050년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을 뛰어넘어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이 된다는 전문가의 예측도 있지 아니한가.
2. 6.15 정상회담과 공동선언:김대중대통령이 꿈꾼 ‘한반도와 국제관계’
김대중대통령은 어느 지도자보다도 국제관계에 밝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현상유지적 외교를 한 지도자가 아니라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의 동학을 잘 이해하면서 그것을 이용한 지도자였다. 그는 냉전질서가 붕괴하고 난 후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기까지의 과도기, 즉 ‘탈냉전 시기’라고 불린 기간에 우리민족이 한반도에서 주인으로서 주도권을 확립하여 새롭게 형성되는 동아시아질서 속에서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려는 비전을 가진 ‘능동적’인 전략가요, 한반도에 관한 한 강력한 국제질서형성자였다.
김대중대통령이 사용한 외교적 수단과 방법은 ‘우리민족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외교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과를 낳았다. 김대통령이 만일 민족화해가 아닌 민족대결을 추구했더라면 중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것은 냉전구도의 지속을 의미했을 것이며 우리민족 자신의 주체적인 활동공간을 만들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의 김정일위원장도 김대통령의 민족 간 화해와 평화정착, 통일을 통한 생존과 번영의 비전에 동의함으로써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이 발표됐던 것이다.
6.15공동선언은 전 세계의 지지를 받았다. 남한과 북한의 동맹국인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남한의 대북정책을 지지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당시 국제 언론의 보도와 해설 내용을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리베라시옹은 ‘남북의 긴장완화의 시작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사건’임을 강조하였으며, BBC와 닛케이신문은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1972년 닉슨-마오쩌둥회담에 비유하였고, 르 피가로는 이를 1970년 동서독 총리와의 첫 만남을 연상시킨다면서 그로부터 19년 후 독일이 통일되었음을 상기시켰다. 쥐트도 이체짜이퉁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남북정상회담은 ‘훗날 한반도 통일의 출발점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뉴욕타임즈는 ‘북한을 불량국가로 취급할 근거가 없어질 것이란 희망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보도하였고, 워싱턴타임즈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가 물려받은 스탈린 체제에서 탈피하려는 대담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 평양을 다녀온 후, 클린턴 미대통령에게 전화하고,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을 워싱턴에 보내 남북정상회담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