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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야 각 정당의 대선후보들이 공통 공약으로 내세운 기초단체장ㆍ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 폐지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물론,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중도에서 하차한 무소속 안철수 후보까지 모두 기초단체장ㆍ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아마도 공천폐지를 바라는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들의 표를 의식한 때문일 것이다.
실제 당시 당 조직의 뒷받침을 받을 수 없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야권단일후보 과정에서 야당 소속 기초자치단제장과 기초의원들의 지지가 절대적인 상황이었고, 그래서 세 명의 후보 가운데 가장 먼저 공천폐지 공약을 내걸었었다.
그러자 당내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야하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 역시 똑 같은 공약을 내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뒤질세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도 같은 약속을 했다.
그러다보니 여야 어느 정당을 막론하고 이제 와서 “공천제 폐지 반대” 입장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공천폐지를 가장 먼저 약속했던 안철수 의원은 생각이 바뀌었다.
실제 그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정당공천제 폐지와 관련, “대선 때는 급하게 준비해서 다른 분야의 영향에 대해 검증이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사실상 공천폐지 공약이 잘못됐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한 셈이다.
특히 안 의원의 싱크탱크인 ‘내일’의 최장집 이사장은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을 해야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정당공천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면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어떤가.
우선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는 4일 기초단체장ㆍ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 폐지를 당에 건의했고, 민주당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찬반검토위원회도 이날 “정당공천제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모두 그 방식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인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는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기초선거 정당공천제를 한시적으로 폐지한 뒤 앞으로 3차례(12년)에 걸쳐 선거를 해보고 추후 폐지 여부를 다시 정하자”며 이른바 ‘일몰제 적용’을 제안했다.
정당 공천제 폐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때문이다. 즉 대선 때 당의 후보가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한번 해보고 안 되면 다시 공천제를 실시하자는 제안인 셈이다. 이처럼 무책임한 제안이 어디 있는가.
민주당도 가관이다.
민주당 정당공천제 찬반검토위원장인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같은 날 오전 국회 당대표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당공천제 폐지의 장단점에 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한 결과 정당공천제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성명부제, 정당표방제, 기호 무작위 추첨제 등 3가지를 제시했다.
이는 기초선거 정당공천제를 폐지할 경우, 상당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찬반검토위원회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공천폐지를 강행하려는 것은 아마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가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선 공약이기 때문에 ‘무조건 실시해야 한다’는 여야 각 정당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필자는 지금 공천제 폐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내년에 실시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으니, 좀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고, 충분히 여론을 수렴한 뒤 올바른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다.
사실 헌법재판소가 2003년 후보자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금지하는 법률조항을 위헌으로 판결한 상황이다. 따라서 정당공천제를 폐지할 경우 '헌법적 권리인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이유로 위헌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위헌논란을 피해하기 위해 사실상의 ‘내천’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 표방제’를 실시한다면 그것은 편법으로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미 ‘내천’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익히 경험해 알고 있지 않는가.
대선 공약이라고 해서 뻔히 예견되는 폐해를 애써 무시하며, 밀어붙이려는 여야 정당의 모습을 옳지 않다. 특히 ‘책임정당정치 실종’이라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고하승:시민일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