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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가 상국으로 섬기던 청나라가 외세에 무너져 가고 노론집단이 일제와 야합하여 국권을 넘기려는 조선말기 정신차린 고종황제는 왜 국호를 한韓(대한제국)으로 정했을까?
그건 국조 단군왕검이 세운나라의 이름이 한韓였기 때문이다.한韓반도라는 지명 또한 이 땅이 본래 한韓땅이기 때문이다.
한韓의 의미는 환하게 빛나는 해(태양)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그럼 문명사적으로나 정치사적으로 인류와 우리 민족을 환하게 비추던 해땅은 어디인가?
바로 중국의 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요하지역의 한국문명과 세계 최다로 분포된 압록강 지역의 적석총 문화를 낳은 호남중심의 서남해 마고성이다. 이 지역을 본래 한韓이라고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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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 후에 국호를 韓이라고 정하고 마.번.진한 등 3한 연방으로 다스렸다.
3한의 군사권과 인사권은 중앙국가인 진한을 다스리는 단군천황께서 가지셨고, 마.번한 지역은 2명의 단제를 임명하고 자치권을 부여하여 다스리게 하셨다.
중국 동해안 지역을 다스리는 초대 번한은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이였고, 한반도.열도를 다스리는 초대 마한은 웅족의 후손인 웅백다였다. 요하문명을 낳은 웅족(마고족)의 뿌리가 한반도임이 입증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3신1체 원리(3태극 사상)에 따라 중앙국가 진한은 으뜸을 의미하는 태일, 마한은 문명과 뿌리의 시원을 의미하는 천일, 번한은 땅의 주인임을 의미하는 지일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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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단군한국 시기에는 중국대륙이 모두 한국의 영토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군한국의 신하 유호의 아들인 유순을 황하이남지역을 다스리는 왕으로 임명하니 중국사에서 순임금으로 불리우는 우리의 선조이고, 순임금이 다스리는 지역은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이 단군으로 임명된 번조선 단군의 감독과 관리를 받아야 했다.
단군왕검의 장자되시는 부루태자께서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순임금의 요청에 따라 중국을 방문하시어 순임금의 하례를 받으시고 땅의 경계를 정해 주시는데, 황하 이북은 단군한국의 직할영토이고, 황하이남은 순임금이 다스리게 하시니 구려KOREA분정이라 했다.
구려분정이란 코리아 한국의 영토인데 순임금에게 위임통치를 맡긴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대 한국의 영토는 절강성 지역 등 황하 이남까지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요하와 서해를 건너 회복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의 경우에는 서해를 건너 순임금이 다스린 영토를 다스렸다. 고로 중국은 우리 한국이 번조선.순임금이 다스린 중국 동해안 지역을 양보하더라도 중국은 최소한 요하 동쪽지역은 모두 통일한국에게 양도해야 한다.
통일이 되면 어차피 만주지역의 조선족과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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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중국에 기 죽을 필요가 전혀 없다. 현재 중국이란 국호도 우리 선조들이 지어준 이름이니까. 양심적인 중국의 사학자들이라면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사학자들도 민족사 연구할 때 뿌리를 찾는 심정으로 심도깊게 할 필요가 있어요. 국사편찬위원회를 식민사관이 차지하면 절대 안 되는 이유다.
그리고 강단.재야사학자들 모두 한반도 문화가 모두 중국에서 나왔다는 역사의식을 갖는 순간 이미 중국에 정신이 흡수되고 말을 상실하는 순간 중국화의 길로 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류문화정책에 정부가 적극 지원을 하고 중국시장 점유를 위한 경제정책과 한국사의 뿌리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철저한 준비로 한.중간 합의대로 인문교류에 힘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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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중국'이라는 국호는 제13대 흘달 단군임금 당시의 선인이였던 한국인 유위자有爲子가 를 정해준 나라이름이였다.
공자의 7대 후손 공빈이 한국(배달국과 단군조선)에 대해 다음과 진술하였다.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단군(檀君)임금이 계셨는데 구이(九夷:동이9족=구려=구리=고리=고려=KOREA)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하나라 요왕 때의 일이다. 순은 동이(단군조선)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셨다. 동이나라(배달국)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배달국 제14대 치우천황 당시의 선인) 이라는 도통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중국의 시조)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웠다. 그는 염제신농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중국 고대 나라인 하나라 우왕이 참석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 동이의 부루(夫婁:단군조선 제2대 단군임금)태자께서 친히 오셔서 나라의 경계가 정해 졌다. 동이인 유위자(有爲子:제13대 흘달 단군임금 당시의 선인)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그 분에게서 '중국'이라 하는 이름을 얻었고 이윤(은나라 개국 공로자)이 그 문하에서 배워서 은나라 탕 왕의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이윤이 말하기를, 동이(단군조선)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함부로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군자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나라 기자(箕子)가 주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땅(번조선 지역 서화)으로 갔다.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도 동이로 가고 싶어 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인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 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위나라 安釐王 10년 곡부에서 공빈 씀"
[원문]東方有古國 名曰東夷星分箕尾 地接鮮白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余亦欲居東夷之意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공자의 7대 후손되는 공빈이 이렇게 단군조선과 단군임금들의 실상을 상세히 증언하고 있는대도 많은 한국인들은 단군조선이전의 배달국은 말할 것도 없고 단군조선과 단군임금들조차 실존하지 않은 지어낸 신화상의 나라나 인물들로 생각하고 있다. 바로 동북공정으로 민족사를 날조하고 강탈하려는 지나국과 일본제국주의가 의도했던 멍청한 바보한국인들 만들기가 적중한 셈이다. 지나국과 서양의 역사와 사상사에는 자랑스러워하며 통달했다는 듯이 달달 외면서 정작 자신을 존재케하는 뿌리역사와 조상 알기에는 인색한 나라와 민족이 과연 흥할 수가 있겠는가 자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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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7웅 중의 하나인 韓을 세운 단군족은 본래 요서지역인 번조선의 제후국으로 서쪽으로 이주하여 춘추전국시대에 노른자위지역에 韓나라를 세운 것이다. 주나라 시기를 기록한 <서경>에는 韓(단군한국)의 제후가 주나라를 방문하였는데, 주나라 선왕이 조카의 딸로 하여금 밤에 시중을 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당시 단군한국의 국력과 영토가 강대하고 방대하였음을 의미하는 기록이고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 후에 국호를 韓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韓이란 국호는 고리족 출신인 22대 색불루 단군천황 때 조선으로 바뀌게 되고, 43대 구물 단군천황 시기에는 대부여로 국호가 바뀌게 되었다.
중국의 '시경'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시경'은 기원전 403년의 한나라 때에 지은 책으로 주나라때부터 춘추중국기 사이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한후는 맥족을 복속시키고 그 땅의 제후가 되었다""한후가 수도에 들자 선왕은 경계를 논하였으며 조카 딸을 시켜 밤시중을 들게 했다"( '시경' 한혁 편) 한혁은 한국(단군나라)의 제후였다는 의미다.
'시경'의 한혁 편은 주나라 선왕 때의 일을 적은 것으로 주나라 선왕은 22대 색불루 단군천황이 임금에 즉위하여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단군한국 후기로 들어 가는 기원전 827~782년까지 재위한 왕으로 한후는 이 시기에 주나라를 방문한 사람으로 기원전 5세기 한나라 시대 사람이 아닌 기원전 9세기 주나라 시대에 등장한 한국사람이다.
이 '한후'를 왕부의 '잠부론'에 언급이 되고 있다. '잠부론'은 후한의 학자인 왕부가 지은 책으로 왕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씨의 근원을 파헤친 "씨성본결'을 썼다. '씨성본결'이 중국에서 천년 동안 금서로 묶여 있는 책인데 이 책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데 '잠부론'에 이 책의 흔적을 남겼다. '잠부론' '씨성'편에 한씨의 유래를 따지면서 '시경'에 나왔던 '한후'를 언급하고 있다.
"시경속 한후는 기자조선(번조선)의 동쪽에 있는 나라(단군한국=단군조선)의 이름이다..한후(단군한국의 제후)는 연나라 부근에 살고 있었다.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 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 후예는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국호인 한(韓)의 기원을 찾아서
단군왕검이 세운 단군한국은 마.번.진한이라는 3개의 한국연방으로 존재했다. 중국 문헌들에서 <조선>으로 기록된 나라는 단군3조선 중에 단군조선의 서쪽 변방지역으로 연나라가 침략하였던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번조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재 강단사학자들은 이러한 중국문헌 속의 조선을 단군조선의 중앙국가인 진조선으로 이해하고, 위만집단에 의해서 단군조선의 중앙국가가 망한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공격타켓이 되었으나, 음해와 누명에 맞서 학문적으로 싸워 극복한 강단사학자 윤내현 교수의 견해처럼 은나라 왕족 기자의 망명이나 위만집단의 이주는 단군조선의 서쪽 변방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였지, 단군조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건은 아니였다는 의미가 된다.
고로 위만조선이 내분으로 망하자, 한나라가 설치한 한4군현 지역도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것이지,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이 주장한 것 처럼 북한지역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 7웅 국가들 중 하나로 7웅의 가운데 지역에 위치했던 한(韓)나라를 세운 주역은 본래 "한후는 연나라 부근에 살고 있었다.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 후예는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넜다"는 '잠부론'의 씨성 편 기록에서 한씨족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한(韓)나라를 세웠다는 의미가 된다.
춘추전국시대의 7웅 중 하나였던 韓은 본래 번조선 지역에 살았던 단군족이였음을 알 수 있다.그럼 한(韓)은 본래 무슨 의미이고 본래 어디에 살았던 한국인들일까? 본래 한(韓)은 환하다.하나다.가운데.임금.중앙을 의미하는 <해>을 의미하는 한자어로 표기된 우리말이다.
그리고, [후한서-한]같은 고대 <지나문헌>한(韓)이라고 할 때는 남한지역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은나라의 왕족 기자의 후손으로 기자조선(번조선)의 마지막 단군이였던 기준이 위만에게 망한 후에 서해바다를 건너 마한땅(남한)을 파하고 '한왕'이라 칭했다고 했는데, 남한지역이 본래 해(태양)을 의미하는 '한'의 땅이였음을 의미한다.
"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그 곳의 노인들이 세대를 넘어 전하기를 '옛날 진역(秦役 : 만리장성 만들기에 동원?)을 피해 망명(亡命)하여 자연스레 차츰 한국(韓國)에 왔다.' 한다.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을 떼어내 주었다."[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출처-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辰韓))
고조선.단군조선이라 할 때 국호 <조선=숙신>은 코리아족 출신으로 22대 색불루 단군천황 때 개정한 국호이고, 그 때부터 <진국>이라 불렀다고 [한단고기-번한세가]에 기록되어 있다.훗날 당나라에게 고리(고구려)국이 망하고 대조영이 국호를 <대진>이라고 정한 것은 바로 22대 색불루 단군천황 때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의미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한(韓)이라고 정할 때는 민족의 뿌리의식을 가지고 정했다 할 것이다. 민족의 고향이 지금까지 필자가 강조해 온 마고성으로써의 호남중심의 서남해 지역의 <해땅=한땅>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인.한웅.한검으로 이어지는 한(韓)씨족는 서남해 마고성에 뿌리를 둔 한인.한웅.한검족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이 한(韓)씨족의 갈래가 번조선 지역에 살다가 서쪽으로 이주하여 춘추전국시대에 노른자위(중앙)에 위치한 한(韓)나라를 세웠고,춘추전국시대라 해 봐야 단군족의 나라들이 아닌가?
번조선 지역의 한씨족은 위만집단에게 번조선이 망하자,기준의 무리에 합세하여 서해바다를 건너 다시 자신들의 본향인 남한의 서남해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대한(韓)민국의 국호 한(韓)의 기원이 궁금해서 추적한 소설가 김진명씨는 이러한 민족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빛낸 우리 한민족의 선조 한비자(韓非子)에 대하여
한비(韓非)는 한(韓)나라의 여러 공자(公子)중의 한 사람이다.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문을 좋아했다. 그 귀착점은 황제(黃帝)·노자(老子)에 근본한 것이다.
한비는 말더듬이로 말은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글은 잘 지었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신의 재주가 한비를 따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비는 조국 한나라가 땅을 잃고 국력이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보고, 자주 한왕에게 글을 올려 진언하였으나, 한왕은 그 진언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에 한비는 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법제를 닦아 밝히고, 권세를 잡아 그 신하를 조종하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력하게 하며, 인재를 구하여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임용하는데 힘쓰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좀먹는 무리를 등용하여 그들을 공로 있고 실적이 있는 사람들 위에 두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유학자는 글로써 국법을 혼란하게 만들고, 협사(俠士)는 무용(武勇)한 것을 가지고 나라의 금령을 범한다. 나라가 편안할 때는 명성과 남의 칭찬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총애하고, 나라에 위급한 때에는 무장한 군인을 사용한다.
지금 나라에서 양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위급할 때에는 쓸모없는 사람들이고, 위급할 때 소용되는 사람들은 평소에 양성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사악하고 바르지 않은 신하들 때문에 등용되지 않는 사태를 슬퍼하고 또 지나간 옛날의 성패득실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그는 고분(孤憤), 오두, 내저설(內儲說), 외저설(外儲說), 설림(說林), 세난(世難)등 십여만언(十餘萬言)의 글을 지었다.
그러나 한비는 남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세난편을 지어 매우 자세하게 설득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한비 자신은 진나라에서 비명에 죽게 되어 스스로 그가 말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史記列傳(사기열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