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독립운동사 인식의 전제 : 국권넘긴 내부세력 단죄해야!
권력이 부패하면 백성이 수탈당하고 외세에 국권을 상실하고 만다. 부패비리 관련자들을 법치주의에 의거하여 강력하게 응징하고 부패비리를 뿌리뽑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덕일 역사학자가 강조했듯이 조선말 수탈에 항거하여 봉기한 동학농민들의 항쟁을 청.일 군대를 동원하여 학살.진압하고 결국 일제에 국권을 넘겨 주었으며, [환단고기]를 위서취급하면서 일제 식민사관을 옹호하면서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기득권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는 부패한 노론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간과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국권상실의 주범세력을 단죄하지 아니하고 외세타령만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외세가 이권과 국권을 차지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이런 부패하고 반국민적인 권력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만 챙기고 나라를 포기할 때 생고생을 하는 건 바로 백성들이고 이름없는 민초들이라는 사실이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백성들과 항일무장투쟁
일제가 봉오골 전투에서 홍범도.김좌진이 이끄는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패하자, 간도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방화 등 보복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문에 무고한 동포들은 집을 잃고 자식까지 잃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가 경신 년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경신 참변庚申慘變이라 한다.
이 때 김좌진 장군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였으니 이 포고문은 김좌진 장군의 독립 정신을 잘 들어낸 글이라 할 것이다.
군정서 격고문
본년 8월 이래로 적의 독균이 간도에 파급되어 슬프다! 우리 무고한 양민이 적의 독봉 아래 원혼이 된 자 얼마며 그 많은 재물과 양곡이 화염 속에 사라진 것이 얼마며 이렇게 땅은 얼고 찬 기운이 뼈 를 깎는데 옷 없고 집 없이 길에서 굶어 죽는 자 얼마인가.
종이 조각에 대한 두 글자만 나타나도 그 집은 잿더미가 되고 탄피의 빈 껍질 하나라도 들어나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니 모든 사랍이 입을 봉하고 서로 눈 질만하고 있다.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학교 를 헐어 문명을 박멸하니 천인이 공노하고 있는도다.
우리 군정서는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 4,5일에 적의 연대장 이하 수십 명의 장교와 1천 2백 명의 병졸을 죽였다. 그러나 부득이 험악한 산중으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재기의 그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포고한다.
정의를 보고 용감한 것이 우리 독립군의 정신이요 싸움에 임하여 물러 서지 않는 것은 우리 독립군의 기백이니 어찌 공로를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하여 대의를 저바릴 것인가. 이 격문이 이르는 날부터 각기 정의를 분발하여 성패를 불문하고 다 함께 함몰되어 가는 민족과 조국을 건져내어서 대한 광복의 대업을 조속히 완성합시다.
김좌진 장군의 포효에 힘입어 간도 독립군은 단결하였다.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어 놓고서도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때문에 간도 땅에 남아 있지 못하고 소련과 만주 국경선으로여 떠나 가야 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언 발로 백설을 밟고 밀산을 향해 갔다, 그 힘없이 걸어 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나라 없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독립군은 소-만 국경선에 가까운 밀산에 집결하였다. 모두 3만 5천명 10개 부대나 되었다. 그 안에는 김좌진과 홍범도 이외에 서간도의 지청천, 안무 등 쟁쟁한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들이 장군들이 한 곳에 집결하였다.
1920년 12월 이들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게 되었다. 대한 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 홍범도, 조성환을 부총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김규식을 총사령, 이장녕을 참모장, 지청천을 여단장으로 임명하였으니 대부분 항일무장세력이 단일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군단은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 통일군단이 되었다. 그러나 무기가 빈약하여 제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레닌에 속아 소련 공산당의 토벌에 궤멸된 항일무장세력
어차피 훗날 무너진 공산주의지만, 당시에는 빚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공산혁명에 지원세력이 필요했던 레닌은 감언이설로 항일무장세력을 속여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그런 공산당의 이중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도지역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고, 결국 고려 공산당원이였던 김일성 등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 때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끊임없이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정치선전을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레닌의 감언이설을 믿고 이듬해(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로 들어 갔다. 이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엄청난 실책이었다.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었다.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베리아에 들어선 대한독립군단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1연단을 이만(이르크츠크)에 두고 2여단을 영안에 주둔시켰다. 또한 사관학교( 교장 지청천)를 개교하였다. 이 때 러시아에서는 혁명 전쟁이 벌어져 전국이 백계白系(왕당파)와 적계赤系(공산당)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레닌이 이끄는 적계 진영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독립군을 자기편에 끌어들여서 백계와 싸우는데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군은 워낙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주는 군사지원을 선 듯 받아 들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양측이 군사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으로 인하여 우리 독립군은 적계 러시아군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게 되었다.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등을 푸짐하게 받았다.
1921년 6월 2일 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유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우리 독립군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우는 독립군인데 갑자기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니 말이 안 되는 요구였다. 이렇게 부당한 요구에 대해 독립군은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은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 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김좌진은 이 때 이미 소련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 오고 말았다. 소련이 생각하기에 당시 항일무장독립군은 자신들의 군사조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편 대한독립군과 당시 소련 정부(치타 정부)간의 협상은 26일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결렬되어 소련군의 대한독립군 토벌이 시작되었다. 1921년 6월 28일의 일이었다. 소련군은 미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패는 뻔한 일이었다.
이 때 독립군은 사망자 2백 72명, 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 5명, 포로 97명 도합 6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나머지 인원이 가까스로 국경을 넘어 소련을 탈출하였다. 다행히 이 나머지 인원 가운데 김좌진 장군이 들어 있었다. 참으로 구사일생이었다 할 수 있다.
포로 97명 가운데에는 지청천 장군이 들어 있었고 홍범도 장군은 소련군으로 넘어가 공산당이 되고 말았다. 지청천 장군은 뒤에 상해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하여 석방되었으나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홍범도 장군은 한 때 우대를 받았으나 말년에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극장 지기로 전락하여 비참한 일생을 마쳤다.
대한독립군단이 겪은 이 참변을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참변黑河慘變이라 한다. 여기서 흑하란 흑룡강을 말한다. 고대 숙신족으로 불리우던 우리 민족의 옛 강토는 흑수黑水 이남 백산白山 이북이였는데, 우리 대한독립군은 바로 그런 우리 조상의 땅에서 러시아라는 이방인들에게 참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김좌진과 홍범도가 말없이 갈라지고 만 것은 가슴아픈 일이였다.
한편 김좌진 장군은 1925년 영안에서 신민부를 조직, 군사집행위원장이 되고, 이어 성동 사관학교를 세워 정예군 양성에 공헌했다. 임시정부로부터 군무총장, 국무위원 등에 임명되었으나 거부하고 항일무장 독립군 양성에만 전력했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이 되어 항일투쟁과 동포의 단결에 힘쓰다 이듬해 과거의 부하였던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 박상실 등에게 영안현 중동로산시역 자택 앞 정미소에서 암살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
[자료]미국과 대한민국의 군사연합으로 한반도 진공작전 계획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자, 미국의 핵무기 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작전수포
광복군 OSS특수부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과 함께 계획했던 조선 본토 침공 작전 계획의 일부였다.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장준하도 광복군oss특수부대원이였다.
광복군 OSS특수부대의 창설과 배경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이하 O.S.S가아닌 OSS로 통칭)은 미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을 성공 시키기 위해 한인 출신의 지하공작원들을 조선에 미리 침투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그러나 실질적으로 전면적인 상륙작전이 아니라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침투 공작)
특히 미군은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으로 편입한 '조선 학도병'출신들이 일본군의 사정에 밝고,광복군이라는 일본에 저항하는세력으로서 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그런 그들과 함께 미군 단독 국내 침투 공작의 어려움을 타개시키는 방안으로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광복군 2지대장 이범석은 미국 14항공대 쉬노우더,중경에 있는 주중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만나서 한미합작의 합의를 하고,1945년 2월 김학규 3지대장은 미군 14항공 사령관 첸놀트 장군과 한미공동작전을 설명하고 아래의 6개항에 합의 한다.
<한 ·미 군사합작 합의사항>
① 한 ·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② 한국 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 작전에 필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한다.
③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기재 및 군수물자를 한국 광복군에게 공급한다.
④ 미군은 한국 광복군에게 육·해·공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⑤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⑥ 합의된 사항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위에서 보듯이 미국은 광복군 OSS 특수부대원들을 국내진공작전보다는 정보 수집을 위한 정찰대로서의 역활을 기대하고 활용하기 원했다.
광복군 OSS특수부대 구성과 훈련
1945년 극동전구 중국전선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 단체인 광복군과 미국 OSS는 한미공동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맞추어서 부대를 구성하고 훈련을 실시했다.
먼저 섬서성 서안과 부양에 한미군사합작을 위한 광복군 OSS 훈련소 설치를 했는데 승인 시기가 1945년 6월경이었다.광복군 3지대장인 김학규는 엄도해,윤영무 등 22명을 적격자로 선발하고 입황 부근의 훈련소 막사에 도착해서 미군용 군복과 보급픔을 지급받고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훈련기간:3개월
교관:윔스대위,마틴상사 특수작전 요원
1)폭파
2)침투
3)사격
4)요인암살
5)무전훈련 및 암호 해독법
6)독도법
7)첩보 수집 및 분석.
8)민사작전을 위한 삐라 작성 및 민사전 부분(민중선동파업)
9)유격훈련
10)도피및 야간습격
1945년 8월29일이 원래의 디데이였다.국치일을 맞이하여 8월29일 국내진공을 염두에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OSS특수부대원들은 8월초에 갑자기 일본 패망 임박하자 작전을 서둘러 변경하기 시작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8월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3개 지구대의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여 8월20일 안으로 함경도로부터 경남 남해까지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카탈리나 섬에서 한인요원들이 공중으로 국내진공을 하는 "냅코 프로젝트"구상했었다.
|
하지만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만약 일본 패망이 1년만 늦어서 조선으로의 광복군 진공계획이 실행되고 광복군 OSS 특수부대원들의 활약이 시초가 되어서 항일 운동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미국도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한미 작전을 진행했을 지도 모른다.
역사는 가정이라는 것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그러나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픈 역사의 오류가 존재하고 있다.이승만 정부가 권력을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고 난 후에 항상 정치가와 위정자들은 민족의 미래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힘을 썼다.
이것은 결국 지금의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결과로 이어져,한국 사회는 민족의 자긍심보다는 권력과 부,개인의 삶이 늘 우선이 되어 버렸다.
비록 전멸당하는 것을 알고 광복군 OSS 특수부대에 자원했던 사람들과 학도병으로 사살의 위험을 인지하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사람들과 독립군으로 있었다는 사실로 온 가족이 고통을 받을 것을 아는 사람들. 왜 그들은 소중한 목숨과 가정과 가문을 버렸을까?
한 개인의 힘은 약하다.그리고 그 개인이 할 수 있는 능력도 적다.위정자의 힘은 강하다.그리고 그 정치 권력은 무한한 힘을 가졌다.
국민의 힘은 나라를 위하지만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력만을 추구했던 역사의 오류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출처 http://impeter.tistory.com/11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