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3한의 맹주였던 서남해 마한(봉황토템)을 통합한 백제의 성장과 대외확장
한강지역에 터전을 잡았던 고구려 고추모의 아들 온조의 나라-십제(마한의 제후국)를 통합한 백제(구태세력)는 서해와 연결된 한강.금강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국력을 뻗쳐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해 나갔다. 한강 강동구 지역의 세계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은 기원2-3세기 무덤으로 법령반포 등 국가기반을 다지고 성장과 대외확장이 시작되는 백제시기와 맞아 떨어지는 고고학적 사료라 할 수 있다.
즉, 공주지역에서 백제를 세운 부여의 구태집단은 금강이북의 마한을 완전 통합한 후에 한강지역의 온조나라인 십제를 통합한 후에 해양강국의 발판을 다졌다는 의미다. 한강지역의 전방후원분들은 초기 백제왕들의 무덤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방후원분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고대부터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던 마한의 해상세력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토착 무덤양식인데, 부여의 구태집단이 이들 마한인들의 토착무덤을 수용하면서 마한세력을 융합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백제가 근초고대왕 시대부터 서해를 건너 진출한 요서. 산동지역은 번조선의 영역으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에 한반도 서남부로 이주하여 마한을 개국한 기자조선 유민들의 고향이며, 백제(구태세력)의 선조 고두막 칸(동명성왕)이 한나라의 침략에 맞서 번조선 유민들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지역으로 백제는 이들 기자조선(번조선)유민들의 꿈을 실현해 주는 동시에 부여의 정통성을 두고 고구려와 패권을 겨루던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마한의 해상세력의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에 기반한 해양제국 대백제(구다라)
백제는명실공히 대해양제국(大海洋帝國)을 건설하였다.
[구당서(舊唐書)]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영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를 포함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고구려 국경까지,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倭國=동백제 야마토 왕조)을 포함하여 다 백제의 땅이다. 백제는 동,서 두 곳에 서울을 두었다." 두 서울이란 본국 한반도를 중심으로 서백제의 커발성이 있는 산동과 동백제 야마토왕조가 있는 오사카다. http://www.scjnet.co.kr/movie/history/baekje.wmv
[삼국사기(三國史記)]최치원 전(崔致遠傳)에 따르면, 고구려와 함께 백제는 전성기에 100만대군으로 단군3조선연방 시기에 번조선 지역에 해당하는 "오(吳),월(越), 연(燕), 제(齊), 노(魯)나라를 다 장악했다." 하였다.
[주서(周書)]백제전에서 "백제는 동진(東晋)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나라때까지 양자강 양쪽을 다 점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황실사서[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는 "금주(錦州), 의주(義州), 애춘(愛瑃)을 포함한 지역을 다 백제의 강역이다."이라 했다.
즉, 지금의 지나국 동해안 지역은 모두 백제가 차지했다는 문헌기록들인 것이다.
그런데, 지나문헌들이 명백히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명백한 백제사의 진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 나라의 사학자들은 누구이며, 백제의 본국을 지나국에 가져가 바치겠다는 사학자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일본과 지나국을 매우 이롭게 하는 매국매족적인 사학자들이 아니겠는가?
|
한성백제의 멸망이후 웅진백제 왕에 즉위하여 대백제 부흥을 실현한 동성대왕(곤지의 아들)
탁록전쟁으로 마무리되었던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10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2차례에 걸쳐 웅진백제 시대에 백제부흥을 이끌었던 백제 동성대왕에게 참패를 거듭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힘으로 강경책을 쓰는 것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정책을 바꾸어 변방 세력들을 중화주의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펴니, 그 때부터 지나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주위의 모든 세력들을 융합한 연합국가로 서서히 변하여 갔다.
|
부여는 43대 구물 단제 때 바꾼 단군조선의 국호다.
따라서 부여인들이 단군조선에서 분가한 흉노처럼 단군조선의 좌-우현왕제로 국가를 통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백제는 본국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과 서에 좌-우현왕이 백제 대왕의 명을 받고 다스리는 두 개의 서울을 두고 22담로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나,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시기에 한성백제가 망하면서 서백제 지역의 백제 제후들이 고구려로 투항하여 서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고구려에 상실하였다.
그러다가 한성백제의 마지막 개로왕의 동생 곤지(오사카 백제신으로 오사카 백제왕)의 아들이였던 동성대왕이 백제대왕에 즉위하면서 서백제 지역이 회복되었고, 동성대왕은 서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서백제 지역을 총괄하는 산동지역의 커발성에 머물면서 임류각을 짓고 오랫동안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고마성(곰나루=공주)의 호족세력은 기득권을 상실할까 두려워 속히 돌아 오기를 종용하였다.그래도 돌아 오려 하지를 않자, 무녕왕을 내세우며 백가를 보내암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동성대왕의 무덤이 산동지역에 존재한다는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가 있는가? 물론 있다.
|
[한서 지리지] 동래군 편에 보면, "동래군에 속한 현중에 견(巾 弦)현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백지래왕의 사당이 있고, 소금담당 관청이 있었다. 사고왈(안사고왈) 견의 음은 견(堅)이라 하였다."
여기서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라는 글귀가 백제 동성대왕의 무덤이 있다는 곳이다. 서백제 커발성이 있던 산동성은 동이의 주 강역이요, 양자강 지역 "회계산에 신시배달국의 황도를 정했던(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 치우천황의 주 강역이었으며,백제의 주 강역이었다. 이 땅은 7세기까지 단 한번도 지나족에게 상실한 적이 없는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
동래군에 나오는 지명들을 보면 래주(액)에서 산동성 끝부분을 의미하는데 백제 동성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 “견(巾 弦)” 지역이다. '황'이라는 지명과 '황산과 황성'이 있고 한자는 다르나 “임류”라는 지명이 있어 동성대왕이 지은 궁궐 '임류각'이 존재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백제와 북위와의 10년 전쟁과 동성대왕의 백제중심국가의 꿈
동성대왕이 한성백제회복에 치중하기 보다 산동지역에 임류각을 짓고 장기간 머문 이유는 서백제 회복과 지배권 강화을 통하여 서백제 세력으로 고구려 서쪽을 공격하고, 가야.신라.왜 연방군으로 고구려 남쪽을 동시에 공격하여 한성백제를 멸망시킨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성대왕의 백제부흥의 꿈은 무녕왕을 앞세우고 권력적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곰나루 웅진세력에 의해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신라왕족 출신으로 소중화주의자였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백제본기-동성왕 편]에도 "북위가 쳐 들어와 물리쳤다."는 짧은 기사내용이 있다.
서기 304년부터 439년까지 북지나에서는 16개의 나라들이 흥기했다가 망하고, 서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의 대혼란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 혼란기를 마감하고 북지나을 통일한 강력한 왕조가 세워졌으니, 그것은 수.당으로 이어지는 선비족의 탁발씨(拓跋氏)부족이 386년에 세운 위(魏)(삼국시대의 위魏와 구별하여 통상 북위北魏 386~534 라고 불리운다)나라이다.
북위는 439년까지 북지나에 있던 여러 북방 유목민 정복자들의 국가들을 차례차례 평정하여 북지나을 통일하였다. 북지나에 통일국가 위나라가 건립되었을 때 회수이남 남지나에는 남제南齊(479~502년)가 있었다.
북위 선무제의 어머니 나라이기도 했던 북위는 권력을 고조 등 선무제 삼촌들인 고구려인들이 장악하고 있어 고구려와의 화평관계가 435년(장수대왕 23년, 망명해 온 연왕燕王 풍홍(馮弘)을 위의 요청으로 죽인 후) 이후 계속되었으므로, 배후의 고구려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고구려를 상국과 모국으로 삼은 북위가 백제 영토를 공격해 왔다.
자치통감 권 136 제기齊紀 2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6永明六년(488년)조에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동성대왕 10년 (488년)의 백제-남제 연합군 /북위군의 전쟁은 대규모의 것이었으며, 이 전쟁이 백제 승리로 끝난 후 동성대왕은 다음과 같은 인사조치를 행하고 이를 백제의 제후국가나 마찬가지인 남제에 통고하였다.
[남제서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건위建威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長史인 고달高達을 용양龍?장군 “대방帶方태수”로,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司馬인 양무楊茂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선위宣威장군 겸 참군參軍인 회매會邁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이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게 보낸 외교 문서 속에 포함되어 남제측의 역사서에 채록되어 오늘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백제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서백제 영토를 다스릴 백제 담로왕들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백제 / 북위의 490년 전쟁 , 백제-남제 연합군 / 북위 전쟁 (494~ 498) 전쟁이 있었고 그 뒤에도 태화 21년 6월 (497년, 동성대왕 19년, 남제 건무5년) 또 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태화 22년 4월)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만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북위는, 이로써 제남, 회수지방을 완전히 백제-남제에 상실하고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결국 태화 22년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했다.[魏書 卷7 高祖紀下 太和22年紀 ‘后之私府 便可損半 六宮嬪御 五服男女 常恤恒供 亦令減半 在戎之親 三分省一’] 동성대왕은 왜 살해되었나?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한 백제가 동백제 지역인 열도로 이주하여 국호를 일본으로 고치고 "담로가 일본을 낳았다."창세신화와 함께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담은 열도중심의 일본사로 편찬한[일본서기]에는 동성대왕이 일본에서 왔다는 기사가 있다.
"4월 왕(개로대왕)이 죽었다.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모대)왕이 유년에 총명하므로... 군사 500인을 자기 나라에 호위하여 보냈는 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일본서기 웅략 23년조)동성왕 뿐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즉위하는 무녕왕도 일본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대왕 즉위 3년 전 백제는 한성 서울을 잃고 고구려군에 의해 개로왕이 참수되는 등의 왕가가 몰살되는 참변을 겪는다.
"개로왕 을묘년 겨울 고구려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낮밤을 공격하자 왕성이 함락되어 위례를 잃었다.국왕 및 태후, 왕자 등이 다 적의 손에 죽었다." (일본서기 웅략 20년 조)
그로부터 3년 뒤 동성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왕족 몰살 당시 동성왕이 살아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녕대왕은 어떤가?무녕왕릉 묘지석과 '일본서기'에 비추어 추측하면 그는 461년 일본 각라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름이 사마(섬)가 된 것이다. 즉, 동성왕보다 세 살 더 많은 사촌형 내지는 이복형인 것이다. 따라서 한성백제가 함락된 이후 무녕왕과 동성왕은 동백제 지역인 해(마한열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과 그의 세력들이 살았던 오사카 간논즈카의 고분 규모에 비추어 보면 당시 곤지집단이 규슈, 오사카 일대를 무대로 야마토 왕조의 주요 정치세력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곤지의 아들인 동성대왕과 무녕대왕은 백제가 파견한 왕자들로서 야마토 왕조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고, 본국 백제가 위험에 빠지자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본서기'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서기 502년,백제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 國人)이 마침내 제거하고 도왕을 세우니 그가 바로 무녕왕이다"(일본서기)여기서 말다왕은 동성왕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를 제거한 ‘나라사람(國人)’들은 누구일까?
동성대왕 시기에 백제의 제 1과제는 고구려에 뺏긴 한성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백제에 치중한 동성대왕은 한성수복을 위한 대 고구려 전에 소극적이었다.
이것은 국내 정치적으로도 한성 백제세력에 등을 돌리는 정책이었다. 또한 동성대왕은 초기 왕권강화 과정에서 백제로 함께 건너온 마한열도의 백제세력을 배제하였고, 사비천도를 계획하며 웅진 세력인 사씨와 백씨의 반감을 사게된다. 그래서 동성대왕은 본국 백제를 떠나 서백제 산동에 머물면서 백제의 황도까지 서백제 지역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반 동성대왕 세력들의 연합이 백가를 사주한 것이 아닐까?
무녕대왕이 동성왕 피습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적 가설이다.그러나 무녕대왕 대에 와서 백제의 정책이 달라진 것만은 확실하다.무녕대왕은 동성대왕과는 달리 두 가지 국가 과제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 백제의 염원인 한성 수복을 위해 대고구려 전쟁을 시작하였고, 야마토 왕조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져 나갔던 것이다. 동성대왕 피습은 단순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후 백제의 운명이 달린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