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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레미제라블>,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시인이며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이 책을 세상에 낸 것은 1862년이다. 이후 130년 동안 31차례나 영화화돼 왔다. 그만큼 레미제라블은 오늘 날까지도 이야기로서의 생명력이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다. 최근에도 뮤지컬과 또 다른 영화가 새 버전으로 맹렬하게 부활한 상태다.
지금껏 레미제라블을 개인적으로는 4편 쯤 봤다. 어릴 적 본 것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긴 교과서에 실린 한 대목,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장발장'이고, 장발장은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이나 감옥살이'한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각인돼 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단골로 방영되는 영화중의 하나이기도 해서 그토록 우연찮은 기회에 여러 번 보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발장이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기억을 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발장은, 굶주리는 조카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서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점이다.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어린 조카들의 굶주림을 보다 못해. 그리고 감옥에 갇힌 후에도 그 조카들이 눈에 밟혀 탈옥을 시도하다가 들켜서 그 누적된 죄과로 결국19년이나 감옥살이를 한다. 빵 한 조각에서 비롯한 결과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운명이다.
가석방 이후 장발장이 사회에서 부딪치게 된 현실은 처참하기만 했다. 취직을 하려면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가석방 상태에 있는 죄수라는 것이 탄로 나고 만다. 그 바람에 일자리는커녕 문을 두드리는 족족 갖은 모욕과 함께 쫓겨나야 했다. 자연히 배를 채울 음식도 잠시나마 몸을 뉠 잠자리도 있을 리 만무하다. 그 결과는 허기와 굶주림 그리고 기력을 잃고 거리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순서로 이어졌다.
장발장에게 찾아온 한줄기 빛은 미리엘 신부의 사랑이었다. 쓰러져 있는 장발장에게는 천행 중 다행이었던지 미리엘 신부로부터 따뜻한 스프와 맛난 음식을 대접받고 하루 밤을 의탁하게 된다. 그러나 순간적인 충동에서 은그릇세트를 훔쳐 달아난다. 이 결과는? 경찰들에게 잡혀서 미리엘 신부 곁으로 끌려오게 된다. 경찰들은 현장검증을 하러 데려온 것이리라. 장발장의 절도가 확인되는 즉시 곧바로 사건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이는 또다시 장발장의 감옥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리엘 신부는 "왜 그대에게 준 것도 다 챙겨가지 못했냐?"면서 남아 있는 은촛대마저 집어서 더 넣어주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정직하게 살아가라. 자네 영혼을 내가 사서 하느님께 바쳤다네.” 라는 말도 잊을 해준다.
8년 후의 장발장은 작은 도시의 시장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직공을 400여명이나 거느린 재력마저 갖춘 공장의 사장이 돼있었다. 장발장은 비참했던 시절의 자신을 잊지 않고 틈만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을 실천하고 있었다. 훔친 은그릇세트로 경찰 손에 잡혀갔을 때 자신을 용서해주며 구원으로 이끌어준 미리엘 신부의 사랑에 새사람이 되어 보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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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이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가석방 중인 죄인임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일반인들과 섞여 살아도 되는 사람으로 비쳐져야만 했다. 이 사실을 뒤집어보면 법을 어기는 결과가 된다. 그러기에 장발장의 과거를 아는 자베르 경사가 나타났을 때는 위기가 닥치고 만다. 자베르의 가치관에서 보면 장발장은 여전히 제거해야할 범죄자로서 비쳤을 테고 한 가지 원칙에만 함몰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다. 냉혈한 같은 그 가슴에는 장발장의 개과천선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의 행보가 빛으로서 작용하지 않는다.
장발장의 위기와 반전을 통해서 악법의 집행자들을 들여다보자. 억압자들은 대게 공권력을 쥐고 있고, 많이 배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권력행사는 피억압자들에게는 탄압에 다름 아니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은 곧 변혁을 상징한다. 한쪽 편에서만 재단하는 선악의 잣대나 잘못된 법 적용은 가치전도에서 오는 모순이다. 그러나 많은 대중들은 약자를 동정하고 이 같은 측은지심의 발로되는 사회를 치유하는 자정용을 한다. 이런 현상은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이고, 영화를 관람하며 장발장을 동정하는 관객들의 정서와도 합치된다.
구원은 결국 한줄기 빛에서 비롯되었다.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아줬고 맛난 음식을 대접해준 미리엘 신부로부터 구원은 찾아왔다. 미리엘 신부는 그가 경찰에게 끌려온 순간 질책은커녕 남아있는 은촛대까지 더 얹어주는 사랑의 모습을 구현한다. 이 순간 장발장은 신부에게서 이타적인 신의 사랑을 맛본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맛본 장발장은 이후 흔들림이 없었고 위기에 닥칠 때마다 자신의 이익과 위선 보다는 정공법을 택한다.
역경에서 발휘되는 실천적 삶의 가치는 늘 새롭다. 왜냐하면 위에서와 같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무장한 장발장은 그를 향해 옭죄고 달아드는 사건과 사고 앞에서도 선을 향한 실천의지를 거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장발장의 행동을 총해서 알 수 있다. 자베르가 보는 앞에서도 마차에 깔린 노인을 구해내고 대신 자기 대신 내몰린 죄수를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법정으로 출두한다. 무엇보다도 팡틴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코제트를 주막집에서 구출하여 평생 돌본다. 또 자베르에게 복수하는 대신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
장발장의 모습에서 복수 보다는 사랑이 더 강하고 위선 보다는 정직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박정례 르포작가/ 칼럼리스트 /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