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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 어머니께서 처음에 제게 '배신감'을 느끼셨던 건... 제 초등학교 4학년 때 함께 연극을 했던 같은반 정혜 때문이었을까요? 하하. 저는 그때 제 딴엔 연극 연습 끝나고 나서 밤엔 그 어린 맘에도 정혜를 집에 꼭 제가 데려다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길에서 제가 걱정되어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절 바라보던 그 시선은... 아마 배신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여느 해처럼 사방에 꽃과 초컬릿이 난무를 했을 것이고, 화훼업계와 제과업계는 간만의 호황을 누렸을 터입니다. 외식업계에서도 혜택을 입은 업체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그것은 일부의 일이고, 코스트코나 월마트 같은 대형 유통매장들의 초컬릿과 화훼 코너들도 어제 무척 북적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며칠 전에 큰아들 지호로부터 문자가 들어왔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아빠, 장미 꽃 한송이만 사려면 어디서 사야 해요?" 어이구... 98년생인 지호는 올해 돌아오는 11월달로 만으로 열 다섯이 됩니다. 우리나라같으면 말 그대로 이팔청춘이니 몸과 마음이 이성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할 때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과거같으면 자기의 가정을 꾸려도 될 이 나이의 아이들은 사회가 강제하는 교육 시스템 안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산업의 역군으로 길러질 기초를 쌓아야 하기에,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돌봐야 할 양육의 의무는 당연히 우리의 것이기에 아빠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변화도 잘 캐치해야 하고, 동시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꽃? 왜?" 어이구. 뻔히 그 목적을 알면서도 다시 물어보는 건 제 짓궂음이 절반이요, 어렸을 때 내가 가졌던 설레임 같은 걸 되새겨보고자 함이 절반입니다. 중학교 때 처음 알게 됐던 발렌타인 데이의 존재. 그리고 조그만 초컬릿을 사서(그게 가나였던가 슈샤드였던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아, 롯데의 '아몬드 초컬릿'이었나?) 꼴에 포장까지 해서 내가 좋아했던 교회의 한 여자애에게 주려고 했을 때 느꼈던 설레임의 추억 같은 것을 아들을 통해 다시 바라보는 셈입니다.
발렌타인 데이를 위한 꽃과 초컬릿. 여기에 편승하게 되는 저도 웃기지만, 그걸 아들의 연애 성공...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튼 저같은 추억을 쌓으라고, 그렇게 사다 주었습니다. 작은아들에게도 물어봅니다.
"야, 권지원, 너는 여자친구 없어?"
"없어요."
아주 쿨하게 없다고 대답하는 지원이를 보면서, 그리고 학교 가는데 까만 구두에 까만 바지, 거기에 까만 셔츠를 입고 거의 삽질의 경지로 준비를 하는 큰아들을 보면서... 저는 그냥 그 나이 또래의 추억들이 겹치는 경험을 하면서, 아빠로서 아들을 바라보는 대견함 같은 것도, 그리고 귀여움 같은 것도 느낍니다. 그리고 이만큼 자란 아들을 바라보는 아빠로서의 뿌듯함도 함께 가집니다.
그런데 애들 엄마의 반응은... 좀 그렇습니다. 지호가 가져갈 꽃을 깨끗하게 가시를 잘라 정리해주고 "이거 그냥 날로 가져가면 되는거야?"라고 묻기까지 해 주지만, 눈엔 틀림없이... 질투라고 불리울 만한 것이 눈가에 앉아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호가 신고 갈 구두까지 닦아주었으면서도. 아주 실실 웃으며 꽃 들고 아내의 밴에 타는 지호를 보며 아내의 거의 독백에 가까운 한 마디는 아, 하고 제 깨달음의 뒷통수를 칩니다. "드러븐 넘. 뭐가 저리 좋을까." 그건 거의 좌절에 가까운 배신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아, 울어머니도... 저러셨겠군요. 제가 정혜 데려다 준다고 했을 때 얼마나 황당하셨을까요. 하하.
올해도 기업들의 장삿속 속에서 발렌타인 데이는 지났습니다. 과거같으면 그냥 이걸 비판할 무엇으로 봤을텐데, 지금은 좀 어른이 된 건지, 제과업계와 화훼업계를 위한 내수진작의 날 정도로 생각합니다. 기왕에 하는 거, 물론 칠월 칠석날이 이런 의미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조금 해 볼 수 있는, 모더레이트한 내셔널리즘도 생겼고... 그러나 아들의 성장, 그리고 아내의 질투를 들여다보면서 제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볼 여유도 생깁니다. 아, 우리 어머니 더 많이 찾아뵈어야겠습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