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상식 속의 허구(虛構)에 너무 많이 노출돼 살고 있다. 가령 이런 경우는 어떤가. 현대 경제학의 시조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은 과연 어느 누구의 손일까.
그 책이 쓰인 1776년이라는 시점, 또 당시 유럽 모든 나라가 기독교문화권이었음을 들어 서뿔리 “하나님의 손”이라 유식한척하면 무식해진다. 스미스의 자술대로면 로마의 주신(主神) ‘주피터의 손’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경제사에 정통한 마르크스경제학자학 박영호 한신대 명예교수한테 전화 걸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은즉 한마디로 “이신론(理神論)자의 논리”란다.
이신론의 신은 천지창조 후 세상만사에 대한 자의적 개입을 일체중지,자연의 내재율에 우주를 맡겨온 한마디로 학술 또는 이론상의 비인격 신으로, 만유인력의 뉴턴이 그 대표적인 이신론자다.같은 이신론자였던 스미스도 그래서 가격결정은 물론 사익과 공익간의 마찰까지도 “이 내재율에 따른 예정조화 덕에 경제 질서가 실현될 것으로 봤다”는 것이 박 교수의 답변이다.
이번에는 서울시내 마을버스 속으로 시선을 좁혀보자.“부정승차의 경우 30배의 벌과금을 부과 한다”는 경고문을 읽고 발끈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니, 감히 무슨 근거로? 내가 벌과금을 물겠다고 너희들과 사전합의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남형두 교수의 해석이 명쾌하다.“오히려 김 선생님을 보호한 조치입니다”라는 해석에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내 상식의 허구가 와르르 무너진데 대해 차라리 쾌감마저 느낀다.
“선생님께서 마을버스에 발을 올리는 순간 버스조합과 선생님 사이에 계약이 성립된 겁니다. 버스측은 선생님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조건으로, 또 선생님은 요금과 무임승차 시 벌과금까지 부담한다는 조합 측 규정을 준수키로 합의한 겁니다. 문제는 조합측이 그 벌과금을 일방적으로 백배까지 올려도 약자인 승객은 속수무책인바, 그걸 막기 위해 국가가 버스업의 인허가업무에 간여하지요. 불평등한 계약자유원칙에 국가가 메스를 가한, 19세기 서구의 법리에서 비롯된 거지요.”
교회에 다닌다 해서 이 상식의 허구를 하나님이 메워주는 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사흘 걸려 닿았던 모리아 산을 자칫 첩첩산중이나 사막의 어디쯤으로 여기는 것도 신자들이 범하는 허구의 하나다. 모리아 산은 지금의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성전, 또 일설에는 예수가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으로 보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진단이다.
예의 허구논리를 이번에는 ‘수소폭탄 전 단계의 핵실험’을 놓고 거듭 핵 분탕질치고 있는 지금의 북한한테 굳이 대입 못할 것도 없다. 이런 작태의 북한을 우리는 여전히 “꿈에도 소원”의 통일대상으로 보란 말인가?
통일 속에 자칫 담겼을지 모를 허구의 가닥을 잡아내기 위해 우리가 북한과 일단 통일을 이뤘다 가정해보자(물론 남한 식 통일이다). 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다른 건 제쳐두고 북한이 그동안 한반도에서 맡아온 ‘충격흡수’장치가 작동불능이 됐다는 게 우선 잡힌다. 충격흡수라니, 무슨 충격? 중국이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가해 온 충격을 말한다. 일단 통일이 되고나서 확연해 진거지만, 분단 이후 북한이 그 충격을 썩 잘 흡수해 왔음이 이제야 드러난 것이다.
어디 흡수로만 그쳤던가? 북한이 똑같은 핵보유국이 된지라 중국과 러시아마저도 이제는 북한의 눈치를 보잖은가. 무슨 말인가? 우리의 분단기간이 그 충격흡수장치의 풀가동기간과 일치했다는 반증이다. 더 정확히는, 분단이 준 순기능이었다는 말이다.
내친 김에, 고 함석헌이 역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남긴 6.25의 해석도 차제에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6.25를 “이조 말부터 해방되기까지 북한 땅에 팽배했던 기독교세가 월남한 북한난민을 통해 남한 땅에 전파되도록 만드신 성령님의 역사(役事)”로 본 것이다.지난 4일이 그의 24주기 기일이었음도 함께 부기한다.<한국일보 2월 9일자 토요에세이>
<김승웅:한국일보 파리특파원/시사저널 편집국장/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국회 공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