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망한 것은 오랫동안 내려오던 중국에 대한 충성의 자세를 버리고 서방세계 특히 신흥 일본에 빌붙은 결과 때문이라고 한 양계초
중국 혁명가이자 사상가 양계초(梁啓超ㆍ1873~1929) 모택동의 호는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윤지(潤之)’였다.또 다른 호도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임(子任)’이었다.왜 ‘자임’이었을까.여러 설이 있지만 양계초(梁啓超)의 호 ‘임공(任公)’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젊은 시절 아직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기 전의 모택동은 당시 중국의 많은 지식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양계초를 따랐다.
양계초는 한족(漢族)이었고, 청나라는 만주족의 나라였다.한족에게는 만주족이나 주변 민족이 모두 오랑캐였다....그 시대의 대표적인 한족 지식인이었던 양계초는 당시의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읽고 있었을까.
오늘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양계초는 <조선망국사략(朝鮮亡國史略)>이란 책과,<조선애사(朝鮮哀史) 5율24수(五律二十四首)>란 시를 썼다.
이러한 글들에서 그는 조선이 망한 것은 오랫동안 내려오던 중국에 대한 충성의 자세를 버리고 서방세계 특히 신흥 일본에 빌붙은 결과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영향권 안에서 생존해야 할 한국이 중국을 버림으로써 전통적인 한반도 질서가 붕괴되었고,이로 말미암아 한국인이 입은 재앙은 결과적으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도 당대의 최고 지식인답게 한국 내부의 치명적인 병폐와 제국주의 열강의 양육강식을 망국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지만,중요하게는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결과라는 생각이 강했다.고종 임금의 ‘황제’ 등극을 소재로 한 것 같은 아래의 시를 보면,한반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기이한 복이 까닭 없이 굴러온 듯 奇福無端至, 아직은 수명부도 받지 않았는데 無胎受命符. 야랑이 천하에 자신만이 제일인가 하듯 夜郞能自大, 제국의 국호에 그네들만 웃음 짓네 帝號若爲娛. 제왕의 칙서 하늘에 알리고 誓廟絲綸誥, 이웃에 구슬 비단 주고받았네 交隣玉錦圖. 임금님의 만세 소리 높이 부르며 千秋萬歲首, 조선은 독립했다 환호성 높네 朝鮮正歡虞.
조선의 망국을 몹시 애통해 한 양계초였지만, 이 시를 보면 중국인의 오랜 우월감이 그대로 드러난다.조선의 임금이 하늘(천자, 중국 황제)로부터 ‘수명부’를 받지도 않은 채,곧 한국이 중국의 속국상태에서 벗어나도 좋다는 승인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황제라 일컬었다고 비아냥대고 있다.
시에 나오는 ‘야랑’은 고대 중국의 서역(西域)에 있었던 작은 나라로,그 나라 임금은 스스로 자기 나라가 천하에서 제일 크다고 뽐냈다는 고사가 있다.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나라 안팎에 선포한 ‘대한제국’을 중국의 지식인 양계초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양계초는 한국이 망하는 것을 일본 망명 중에 지켜보았다.1889년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청나라가 열강 앞에서 곤욕을 치르고,한국이 청나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동아시아권에 대변동이 생겨,마침내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역사의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애통해 하고 충격을 받은 것은 한국의 망국 그 자체라기보다는,한반도의 지배세력 교체에 따르는 문명권의 몰락이었던 것이다. ...............
참고로,위 글의 주인공 되는 양계초가 어떤 인물인지를 약술한 필요가 있다 싶어 네이버에서 찾아 그의 사진과 함께 아래 약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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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는 누구인가?
중국의 사상가. 강유위(康有爲)로부터 배우고 그의 입헌제 주장 및 대동설(大同說)에 공감하여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었으며, '무술신정'(戊戌神政, 1898) 때는 그의 참모가 되었다.
1896년, 중국인에 의한 최초의 잡지인 『시무보』(時務報)를 간행하였고,위의 '무술정변' 실패 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叢報), 문학지인 『신소설』(新小說)을 간행하였으며, 일본어의 어휘ㆍ문체를 도입한 독특한 문체로 청말의 청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등, 활발한 언론 활동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면서 혁명파(공화제)에 반대하였다.신해혁명(1911) 후에는 원세개의 제정(帝政), 장훈(張勳)의 복벽운동(覆壁運動)에 반대하는 한편,군벌 정부의 요직에 참가하였다. 강유위가 끝까지 유교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해,그는 서양 사상의 소개 등에 힘을 기울였다(베이컨, 데카르트, 루소, 괴테, 칸트 등을 소개).
그러나 과학에 대해서 종교의 우위를 주장하는 등, 중국 봉건사회의 사상적 흔적을 보이고 있었다.만년에는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해 깊이 심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