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이른바 '살인독감' 이 확산되어 사망자가 1백명 이상을 넘어선 것은 벌써 두어 주 전의 일입니다. 감기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란 것이 원체 종류가 많은데다가, 바이러스 스스로도 변이를 통해 백신을 뛰어넘는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항생제도 통하지 않는 '수퍼 바이러스'란 것이 나와서 사람들을 위협할 것이라는 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요.
실제로 미국에서 이 땅에서 원래 삶을 영위하고 있던 원주민들이 죽어간 가장 큰 이유도 백인들의 학살 외의 다른 이유로는 백인들이 가지고 온 역병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 대륙으로 건너왔던 이민자들이 그런 세균에 노출되어 본 적이 없었던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즉 이민자 개개인들이 모두 살아있는 세균무기였던 셈이죠. 겪어 보지 못한 질병은 우리 몸이 대응할 시간과 체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치명적일수밖에 없습니다.
독감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폐렴으로 전이되는 것이 쉽기 때문이고, 일단 폐렴으로 전이되고 나면 치사율이 크게 높아집니다. 특히 면역력이 떨어지는 나이드신 분들이나 저항력이 떨어지는 어린이들에겐 더욱 위험하죠.
요즘 감기가 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항생제를 먹어도 잘 듣지 않고, 치료에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기 때문일 것입니다. 증상을 완화시켜주는 일반 감기약을 먹고 조금 낫는 듯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거죠. 또 한가지 사회적 요인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실직의 위협 때문에 일을 빼먹을 수 없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죠. 물론 저처럼 병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즘처럼 경기는 불안하고 비정규직이 많은 상황에서 결근은 해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해도 시애틀의 거리를 걸어야 하는 우체부인 저는, 오늘 감기 기운이 조금 사라진 듯 하여 여느날처럼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잠들기 직전 하도 기침이 심해서 갈비뼈에 묵직한 통증까지 느껴져서 일을 빠질까 하다가 결국 책임감 앞에 굴복했습니다. 그렇게 우체국에 갔는데, 우편물이 많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새로 이사온 사람 앞으로 보내지는 '이삿짐'이 제 소포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려 스물 한 개의 커다란 소포가 그 한 주소로 배달되어야 했는데, 각 소포엔 번호들이 매겨져 있었고 그 숫자가 29에서 끝나는 것으로 미뤄 짐작컨데 이런 소포를 다음 날 여덟개를 또 배달해야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어떤 소포들은 책을 넣은 듯 굉장히 무겁기까지 했습니다.
수퍼바이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와서 찾아가라고 해. 이건 너무 많고 무거워. 그냥 확인 통지서만 남겨."라고 지시했습니다. 저도 도저히 이 짐이 다 우편 트럭안으로 들어가지 않는지라, 수퍼바이저의 지시가 반가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배달을 시작하고, 제 배달 구역 가운데 쯤에 있는 그 아파트에 들렀을 때, 메일 트럭을 기다리는 젊은 커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 우리 우체부인가요?"
저는 한눈에 그들이 그 '스물 한 개의 패키지'의 주인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런가요?"하고 저는 통지서를 꺼내어 그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 맞아요." 그런데 그들의 얼굴에 낭패의 표정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차가 없어요?"
"아직... 구하지 못했어요."
알고 보니 그들은 하와이에서 이사 온 부부였는데, 심지어 그들의 자동차조차도 당연히 배로 부쳐야 했고, 그 바람에 아직 자기들의 운송 수단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이 부부를 도와주면, 정해진 시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수퍼바이저의 지시를 어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자기들 차도 없는 신혼부부. 에이, 참 쉽게 마음 속에서 결정은 내려졌습니다.
"15분만 기다려요."
그리고 저는 우체국으로 내달려 낑낑거리고 그 스물 한 개의 짐을 다 때려 실었습니다. 마침 대부분의 대형 소포는 미리 배달했기에 제 우체국 깡통 트럭엔 충분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 묵직한 짐을 싣자 트럭이 달리는 것이 묵직해졌다고까지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비상라이트를 켰습니다. 트럭의 뒷문을 열자마자 쏟아질 것 같은 그 짐들을 조심해 한 개씩 내리는데, 그 부부가 달려나와 저와 함께 짐을 날랐습니다. 한참 땀을 쏟고 있는데, 수취인 부부의 아내가 제게 뭔가 빨간 테두리가 씌워진 반투명 플라스틱 가방 하나를 건네 줍니다.
"이게 뭐지요?"
"스낵이예요. 너무 지쳤을텐데, 드세요."
하와이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그 안엔 재밌는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말린 파인애플, 오징어채, 문어포, 말린 파파야, 그리고 그녀는 극구 사양하는 제게 15달러의 돈을 찔러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에요."
"아뇨, 남편이랑 저랑 이렇게 말했어요. 눈을 보니 정말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요."
어... 내 눈이 말도 할 줄 아나...?
정말 도와주고 싶었던 건 맞습니다만... 결국 저는 주는 걸 다 받아들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선 수퍼바이저가 맞춰 달라고 했던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말 엄청나게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뿌듯했습니다. 악수를 청하며 고마워했던 그 젊은 부부 역시, 정말 고마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오늘 비록 조금 고생하고 아팠어도,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치료해 주는 진통제가 되어 주었습니다. 흠, 하와이 사는 사람들에겐 우리 식의 스낵들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오징어채라니. 하하. 짭조름하게 씹히는 오징어채가 그냥 '정'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오늘 라우트에서 또 한 가족, 저와 정을 나눌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 삶의 천연 진통제입니다.
애구, 또 기침하네. 다행히 내일은 쉬는 날. 푹 쉬고 모레는 건강하게 일 나가야겠습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