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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국민적 행사 '리멤버1.21'
지난 1월 21일 '리멤버1.21' 행사가 수도권 일원에서 요란하게 펼쳐졌다고 한다. 고상한 영어가 동원된 행사명이어서 전작권 인수와 함께 사라지게 될 한미연합사가 해체되기전 한미동맹사에 길이 기억하게될 그럴싸한 연합훈련을 전개한게 아닌가 하였더니 그게 아니였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남동생인 박지만씨의 육사 37기 동기생인 육군중장 신원식 수방사령관이 연출한 수방사 단독 작품이라는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지난해 중장으로 진급하여 수방사령관에 보임된 신원식 중장이 연출한 회심의 역작(?)이라는 입방아 찧는 소리가 심심찮게 나돌았다.
이처럼 세인의 관심을 모은 '리멤버1.21'은 박근혜 당선인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절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인민무력부 산하 총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나뭇꾼의 신고로 발각되어 청와대 코앞인 세검정 일대에서 군경과 총격전 끝에 실패한 '1.21사태'재현극이다.
45년전 발생한 '1.21사태'는 124군 부대원 2400명 가운데 40킬로그램 무게의 완전군장을 짊어지고 한시간에 12킬로미터를 주파할 수 있고 백발백중 특등사격술, 일당백의 격투기로 무장한 최정예 요원 가운데 선발된 살인병기에 의해 저질러진 도발이다.
이들 북측 살인병기들은 열흘전인 1월 10일 무장한 사회안전원과 노동적위대원 수십명이 지키던 황해북도 사리원 인민위원회 습격으로 예행연습까지 마친후 철책선을 뚫고 남하하여 청와대 300미터 전방인 경복 고등학교 후문 앞 길에서 신고를 받고 검색에 나선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을 총격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출동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과 총격전과 이어진 소탕전 등 격전끝에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 1명 생포, 1명 월북 도주로 마무리 되었다.
1.21사태로 우리측 피해도 막심했다. 민간인 희생자 5명을 포함해 30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정권의 심장부인 청와대를 불과 300미터만 남겨 놓을만큼 깊숙이 침투한데다 마치 축지법을 쓰듯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신속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도주로 차단 실패 등 대침투작전능력에 숱한 문제점이 노출된데 군은 물론이고 국민적 충격이 컷다.
1.21사태를 겪으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은 북측의 추가도발에 대비한다는 명목하에 향토예비군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창설하는등 국민 군사 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이와같이 국가안보 대비태세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1.21 사태에 대해 그동안 군은 내부적으로도 별다른 행사를 가진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포된 김신조는 시시때때로 반공교육 소재거리가 되면서 국민들 기억에 살아있지만 당시 작전에 투입되어 전사하거나 순직한 군인과 경찰은 존재감조차가 없을만큼 찬밥신세였다. 이러다보니 젊은 세대는 알지도 못할만큼 국민적 기억 저편으로 잊혀진 1.21사태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국민적 행사라는 거창한 행사로 부활하여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번 행사의 주체가 된 수방사는 안보 중요성과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고 민관군 안보다잡기 명목으로 지난 19일 연예병사 가수 '비'까지 동원하여 당시 무장공비 침투로를 답사하는 '제1회 서울시민과 함께 하는 나라사랑 걷기 대회'를 시작으로 21일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당시 총격전이 벌어졌던 서울 종로구 세검정 일대에 수방사 경비단과 경찰 112타격대를 투입하여 '리멤버 21'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모자랐던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수방사가 위치한 관악산 남태령 일대에서 특전사 707특임대대와 경찰특공대가 참가한 2차 재탕훈련을 실시했다. 이외에도 올해부터는 당시 전사자 묘역을 참배하고 유가족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한다.
실제 이날 수방사 예하 56사단장 김규하 소장은 1.21사태때 전사한 박삼조 상병의 셋째딸인 고양시 덕양구에 살고있는 박숙경(46)씨를 찾아 정확한 전사날짜를 알려주고 위로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경계작전 실패 책임,교훈은 없고 훈포상,승진잔치 대북규탄만 남은 1.21사태
기억에서 사라진 1.21사태를 '노크귀순'등 경계실패로 인한 총체적인 안보 파탄상황하에서 국민적 안보경각심을 항양시키기 위해 '리멤버1.21'이라는 국민적 행사를 개최하였다는데 무슨말이 필요하겠는가. 당연히 칭찬을 해주어야 하겠지만 국민적 시선이 냉담하다는 점에서 그럴 수 없다는 점이다.
'리멤버1.21'행사에 대해 국민 일각이 공감하지 못하는것은 수방사측의 정치성 행사가 아니라는 강력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차원의 진정성에 입각한 행사라기보다 1.21사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박근혜 정권을 의식한 정치적 전시행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과 더불어 1.21사태의 본질에 대한 왜곡과 호도때문이라는 생각때문이다.
1.21사태는 당시 박정희 정권은 물론 전두환, 노태우정권 등 역대 보수정권의 수십만명을 동원한 관제 북한규탄 궐기대회 개최와 북한도발 부각 안보교육으로 사태의 본질이 철저히 왜곡되어 왔다.
1.21사태가 정전협정을 위반한 대남 군사도발이라는 점에서 북측이 규탄받는건 당연하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건 1.21사태는 반공과 안보를 국시로 정해 안보전문집단임을 정권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말과 다른 망국적인 안보무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적의 어떠한 도발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안보대비태세를 갖추었다면 감히 북한군이 철책선을 돌파하여 무인지경으로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적의 침투기도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정보무능, 철책선을 뚫고 수십킬로미터를 남하하는데도 나뭇꾼의 신고가 있기전까지 낌새도 채지못한 철저한 경계실패, 적의 이동속도와 예상도주로 판단 착오에 따른 작전부실등 총체적인 대침투작전 실패로 귀결된 안보파탄을 웅변으로 보여준게 1.21사태다.
철책선 경계만 완벽했다면 적의 침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고 침투에 따른 군과 민간인 희생도 없었을 것은 물론이다. 나아가 경계 성공에 따른 국민적 신뢰도 한층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계 실패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신상필벌, 대침투 작전에 대한 실질적인 대비태세 강구 보다는 수십만명의 국민을 동원, 대대적인 대북규탄궐기대회로 책임소재를 덮는 한편 소탕전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내부적으로는 요란하게 훈포상, 승진잔치를 벌였다.
이와같은 무책임, 몰상식, 몰염치한 대국민 안보사기극은 불과 열달만에 1.21.사태보다 세배 규모에 달하는 126명의 124군부대 삼척-울진 지구 침투라는 충격적 제2의 경계실패로 나타났다.
1.21사태때와 마찬가지로 10월 30~11.2일 사이 아군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을만큼 속수무책으로 침투를 허용한 삼척-울진지구 무장공비 소탕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소탕작전을 펼쳐 5명 생포와 2명 자수 외에 나머지 잔당 사살로 작전을 마무리 하였으나 아군전사 38명, 이승복 군 등 민간인 피살 23명, 부상 64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또 그해 12월 4일에는 KAL기 납북사건이 터졌고 2년뒤인 1970년 6월 5일에는 해군함정이 피납되었다. 당시 함정에 승선했던 해군장병 20명은 아직까지 미귀환상태다. 그해 6월 22일에는 국립묘지 현충원 폭발물 설치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경계실패, 안보무능의 상징 1.21사태를 국민적 행사화는건 부적절
생전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을 지칭 "미친개는 몽둥이로 때려 잡아야 한다"고 큰소리 쳤지만 연이은 경계실패로 북측의 대남 침투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이와같은 크고작은 안보 실패 사례 가운데 1.21사태와 삼척-울진지구 사태는 박정희정권의 안보무능, 안보파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