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은 후 병원 뒷산으로 잠시 산책을 나갔다.‘또르륵¯¯-.’ 오솔길 밤나무 숲에서 떨어지는 밤알이 바윗돌에 맞아 퉁기는 소리다. 밖은 정말 맑게 개인 한국의 가을이 아름답게 널려 있다.언제 태풍이 지나갔냐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병원 뒷문으로 돌아오며 슬쩍 차고를 둘러본다. 아직도 차고의 일부는 꺼므스럽게 그슬려 곳곳에 타는 냄새를 풍긴다. 지난 주말에 어느 환자가 불을 지른 흔적이다.
요양병원 치매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 기억, 판단, 집중, 문제해결 능력 같은 인지장애를 나타낸다.그 중의 상당한 수가 인지장애와 더불어 초조, 배회, 난폭함 등 문제 행동을 일으키고 있다.특히 난폭한 행동은 병원 치매환자의 40%에서 관찰되어진다.
난폭한 행동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외적 요인으로는 부실한 병원환경, 간병인과의 인간관계 악화며 내적 요인은 통증의 악화, 우울증, 정신증의 발생, 그리고 치매가 중증으로 진행하고 있는 경우다. 난폭한 행동을 조절하기 위해 보통 항정신제를 사용하고 있으나 효과는 제한되어 있다.또한 항정신제는 부작용의 위험성이 많아 단기간 조심해서 써야 한다.따라서 무엇이 난폭한 행동을 일으키는 가를 파악하는 게 예방 차원에서 중요하다.
방화의 주인공은 폐암 말기의70대 남자 환자로 지난 주말 병실을 방문온 딸자식에게 이름난 대학병원에서 다시 한 번 정밀검사를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딸은 작은 오빠와 상의한 뒤 알려 주겠다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요양병원 환자들은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자책감과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다.
또한 그들의 외침은 대부분 가족들에게 소외당하기 쉽다. 딸이 다녀간 뒤 노인은 슬펐다.이어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쳤는데 나의 마지막 소원을 건성으로 듣다니.”
노인은 내가 아는 한국의 어느 은퇴 기자처럼 젊은 시절에 혀 깨물고 쏘다니는 들개처럼 등골 휘어지게 일을 했던 것이다. 노인은 불길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 병실 밖으로 나왔다.그리고 홧김에 차고 옆에 쌓아놓은 쓰레기 더미에 성냥불을 그어댔다.
불길이 솟아오르자 소방차와 경찰이 달려왔다.병원 측은 치매환자의 실수로 불이 났다고 설명했다. 그 때 노인은 앞으로 나오며 큰 소리로 “아니요, 내가 일부러 불을 질렀소.나는 치매환자도 아니니 변상은 내 자식 놈들한테 받아 가슈”라고 외쳤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거의 모든 세상사들이 좋고 나쁨이 있듯 수명의 연장 또한 좋은 면과 나쁜 면 이 한 데 뭉쳐 있다.Golden age, Cream of pie, Wise and cool등 아무리 늙음을 미화해도 늙어 감은 슬픈 것이다. 거기에 중병까지 얻게 되면 말 할 수 없는 심적 고통에 빠진다. 참말로 늙는다는 사실은 Bull shit이다.
노년기에 접어들면 일반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많아진다. 매사에 조심하며 자신감이 없어지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 드리려는 의지도 약해진다. 이러한 성격 변화에 따른 노년기의 적응 양상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성숙형이다.늙어가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인생의 불운과 실패보다 행운과 성공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다.삶의 도사가 되는 것이다.
둘째, 은둔형 이다. 은퇴로 부터의 해방감을 즐기며 한적한 교외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삶이다. 가장 보편적인 현상으로 ‘흔들의자의 노인’들을 칭한다.
셋째, 투사형이다. 늙어감을 부정하고 젊을 때와 한가지로 악착같이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는 삶이다.갑옷 입고 늙음이란 적과 싸우는 전쟁터의 노인 격이다.
넷째, 분노형이다. 자신의 일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배우자나 시대와 사회 탓으로 돌린다.병든 육체 보다 병든 정신을 고쳐야 하는 한 품은 자들의 삶이다.
다섯째, 자책형이다. 인생의 실패만을 강박적으로 회상하며 모든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나를 위해 울지 말아 달라’는 토스토에프스키의 소설<지하생활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내가 늙은이라면 어디에 속할까? 한번 생각해 보자.
앞서 말한 폐암 말기 노인은 아주 가벼운 치매증세가 있어서 약물치료는 보류했다.이런 경우 강도 높은 상담치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담환경이 여의치 않은 요양병원 같은 곳에서는 하기가 힘들다. 정신과의사는 펄펄 끓고 있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다음과 같은 간단한 방법을 사용한다.
먼저 환자로 하여금 눈을 감고 심호흡을 두 서너 번 하게 한 후 ‘나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다’를 반복하여 중얼거리게 한다. 다음에 ‘왜 화가 났는지, 만약 다른 사람이 똑같은 화를 냈다면 내 기분은 어땠을까?’를 물어본다. 끝으로 순간의 분노는 부메랑이 되어 나중에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몇 년 전 미 버지니아 공대의 무차별 총격 참사는 범인이 한국계라서 한인 커뮤니티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왜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까?
정신분석학의 태두인 프로이드 선생은 제 이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대학살을 목격하고 인간의 본능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사랑과 삶의 원동력인 에로스와 죽음과 파괴의 타나타스)
프로이드는 모든 인간의 마음은 에로스와 타나타스를 이어주는 선상에 놓여있으며 선은 에로스 쪽, 악은 타나타스 쪽이라고 설명했다. 프로이드보다 한참 뒤의 정신분석 정신과의사인 칼 맬닝거에 의하면 프로이드가 말한 인간 본능의 융합체인 선과 악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마치 농부가 땅을 일구고, 잡초를 뽑고, 가뭄과 싸우다 보니 곡식이 어느덧 익어 추수를 하듯 인간의 삶에도 파괴와 죽음, 생산과 창조가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공격, 분노, 폭력행위를 본능의 부산물이 아닌 부정적 환경에 대한 자아기 전으로 보았다. 그래서 부정적 환경을 완전하게 정복하려는 비정상적 자아 기능이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을 내려준 것은 없다.
어느 학자가 분노와 수명에 관해 연구를 많이 했다.그의 결론은 분노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친한 친구 하나가 심하게 비난하자 그만 분통이 터져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이렇게 속이 너무 상하면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 생명까지도 잃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죽음으로 확실히 확인해 주었다. 분노는 자신이 공격당할 때 느끼는 감정의 표현이다. 분노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안다면 다음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좋은 도구도 될 수 있다.
현대는 다혈질의 세대이다. 현대인들은 하찮은 일에도 화를 벌컥벌컥 내며 달려든다.이성과 판단보다 감정에 따라 사는 요즘 사람들이요, 요즘 세상이다. 가슴 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세상과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만한 성자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용서하고 잊어버리자는 카네기의 말을 음미해 볼만하다.
<천양곡/신경정신과 전문의/일리노이 주립정신병원 Chief Psychiatrist, 시카고大 의대
정신과 임상강사 역임/서울대 의대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