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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차베스!" 군중 환호속에 출범한 차베스 정권
1998년 치러진 대선에서 서민층 80%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전체 득표율 56%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지난해 2012년 10월 치러진 대선에서 또다시 승리하여 4선 고지에 오른 베네수엘라 국민영웅이자 남미의 풍운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1년 6개월전 발병한 암 재발로 쿠바에서 지난해 12월 11일 네번째 암수술을 받았다.수술후 차베스 대통령은 호흡기 감염으로 1월 10일 예정되었던 대통령 취임식이 무기 연기된 가운데 당일 차베스 없는 차베스 정권이 출범했다.
이날 차베스 대통령을 대리하여 전면에 나선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은 국민들을 향해 "우리는 차베스 대통령에 완벽한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모였다"면서 "나는 이자리에서 부르주아들로부터 해방된 대중들의 지혜와 힘, 신의로 차베스 대통령을 수호할 것을 약속한다"고 선언했다.
대통령 궁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마두로 부통령이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수호를 다짐한 차베스 정권 출범식에는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카 니카라과 대통령등이 참석하여 힘을 보탰다.
또 대통령 궁 앞에 운집한 수많은 차베스 지지자들은 한결같이 '나는 차베스다'라고 쓰여진 붉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우리 모두가 차베스! 차베스여 영원하라!"를 외치며 베네수엘라 국기와 차베스 대통령 사진과 피켓을 흔들며 차베스 지지를 다짐하고 쾌유를 빌었다.
차베스 대통령이 재발한 암치료를 위해 쿠바로 떠난 이후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의식불명에 빠지면서 유고를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것 같다.12일 차베스 대통령을 문병한 차베스 대통령 친형인 아단 차베스 바리나스주 주지사는 "차베스는 혼수상태가 아니며 치료를 잘 받고 있고 매일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며 유고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기 때문이다.
마두로 부통령도 20일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차베스 대통령의 상태가 수술 후 회복과정을 넘어 다음 단계 치료를 진행하기에 충분할만큼 좋아졌으며 조만간 베네수엘라로 귀국할 것이라는데 낙관적"이라고 밝혀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점도 그렇다.
빈곤,문맹으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킨 국민영웅
차베스 대통령의 병세 호전 소식과 달리 한편에선 차베스 대통령의 암투병이 유고 가능성을 전망할만큼 심각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베네수엘라 내부 정치지형은 물론 쿠바, 니카라과,과테말라, 도미니카,자메이카,아이티,가이아나,수리남 등 중남미 카리브해 17개국에 연간 70억달러어치의 석유를 반값에 공급해가며 구축한 반미벨트, 이란과 베네수엘라 동맹, 대테러 공조, 미국기업에 대한 규제문제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도 줄을 잇고 있다.
특히 좌파 민족주의적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 구축에 반기를 들면서 2002년 베네수엘라 차베스 축출기도 쿠데타 배후로 미국을 지목한것을 계기로 2012년 양국 대사관계마저 단절되었다.이처럼 차베스 집권 14년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해온 미국의 경우 차베스 이후에 대한 기대가 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유고에 따른 미국의 희망적인 기대는 김칫국 마시기로 끝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 14년동안 베네수엘라 국민적 영웅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1954년 7월 28일 바리나스주에서 부부교사로 일하던 아버지 우고 데 로스 레예스 차베스와 어머니 엘레나 프리아스 차베스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에스파니아,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 후예다.
차베스는 17세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7년동안 군인의 길을 걸으며 주요 요직을 거쳤다. 차베스는 중령시절인 1992년 2월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경제실정으로 국민적 불만을 자초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정권을 전복시키고 좌파 민족주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5개부대를 동원하여 군사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러나 수도인 카라카스 점령과 페레스 대통령 체포에 실패하면서 불발로 끝나 1994년까지 2년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사면후 차베스는 1998년 대선을 겨냥한 제5공화국 운동을 조직하고 특유의 카리스마와 직설적이고 격정적인 연설솜씨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 1998년 대선에서 56%의 지지를 받아 권좌에 올랐다.
차베스는 집권 초기 3년동안 우여곡절 속에서도 당선된지 얼마 안되어 자신이 내세운 사회정의를 구현할 정치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제헌의회 소집 국민투표(72%지지로 통과)를 실시하고 이어진 제헌의회 총선거에 연합세력들과 창당한 '애국창살'로 총선에 참가 131석 가운데 95%인 120석을 휩쓰는 압승으로 대통령 임기 5년에서 6년 세번 18년 연임, 양원국회를 일원 국회전환 및 권한축소, 헌법감시 검찰직 도입, 국회임명 판사 공청회통한 임명 전환등 350개조의 새헌법을 마련하여 국민투표로 확정하였다.
새헌법에 의해 실시된 2000년 8월 총선에서 차베스 연합당은 의석의 과반이 넘는 3분의 2를 석권하고 역시 새헌법에 의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60%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국회가 통과시켜준 '권한부여법'을 이용 직접 일년동안 탄화수소법, 토지법등 49개 행정조치법을 만들었다.
이로써 개혁을 일사천리로 밀어부친 결과 정부 보조를 받는 무료의료제도,대학까지 무료교육등 사회복지 수준향상을 가져왔으며, 자본흐름 통제로 40%인플레를 12%로 떨어뜨리고 경제성장률을 4%로 높이는 성과를 올렸다.
2002년 발생한 쿠데타를 이틀만에 진압한 차베스는 2003년 150만 성인 문맹인구를 대상으로한 무료읽기, 쓰기, 셈하기 '로빈슨미션'과 원주민 생활,종교,토지,문화,권리보호를 주요내용으로 한 '과카이프로미션',그리고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한 2백만명에게 무료로 고등교육을 받게하는 '수크레미션'을 연달아 추진하여 대중적 지지를 확고히 하였다.
그 결과 2006년 12월 3일 대선에서 60%의 지지로 경쟁자인 마누엘 로살레스를 물리치고 3선고지에 올랐다. 차베스는 2007년 영구집권을 위한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사회복지정책등 69개 조문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2009년 2월 15일 다시 국민이 연임제한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뽑고 뽑은 대통령이 잘못하면 끌어내릴 수 있는 대통령 국민소환제 개헌안을 찬성 54%의 국민투표로 가결시켜 지난해 치러진 대선에서 4선에 성공하여 20년 집권을 보장 받았지만 암투병으로 불투명한 상황으로 바뀐것이다.
차베스 유고후에도 후계체제 지속전망
비록 차베스 대통령의 건강이 악화되어 유고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동안 차베스대통령이 집권 14년동안 양극화 타개를 목표로 저소득 빈곤층에 대한 무상교육, 무상의료, 현금 생계비지급, 저가주택공급, 최저유가제도 등 각종 복지 정책 추진을 통한 사회정의 구현으로 대중적 지지가 확고한 상황이기 때문에 다시 대선이 치러진다해도 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투병중인 차베스 대통령이 다시 대선이 치러질 경우 후계자로 지목한 마두로 부통령을 지지해 달라고 밝힌데다 차베스에 대한 동정표가 결집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그동안 차베스가 반값 석유공급을 바탕으로 구축한 중남미 반미좌파성향의 '미주를 위한 불리바르동맹'등 반미좌파 블록 참여국가들이 반값 석유공급 중단으로 입게될 경제파탄을 우려 차베스 후계정권 지원에 발벗고 나설 수 있다는 점도 미국의 기대치를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물론 차베스의 포퓰리즘적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