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다 보면 허물도 많은 법, 길어도 마흔 못 미쳐 눈 감는 것을 마땅히 알라.
- 일본 겐코 법사의 책 ‘도연초’에서
한 개체의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나 실패는 아니다.적어도 어느 종의 존속을 유지하는 연결고리의 일부이며, 세상 존재사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긴 공을 세운다.
새해 첫 달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그런 의미에서 크게 불쾌하지 않을 듯싶다.초 고령화시대(65세 이상이 인구 10명당 2명꼴)가 그리 멀지 않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연스런 삶, 평온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시토비 고조는 40년 동안 외과의사로 일하다가 요양병원 상근 의사로 진로를 바꿨다.그가 일본의 요양병원에 근무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라는 책을 펴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40년이란 긴 세월의 정신과의사를 접고 노인들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는 요양병원 의사로서 많은 동감을 했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 질환이 찿아 온다.65세-75세까지 노인의 30%, 75세 이상은 50% 넘게 만성질병을 앓을 확률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건강수명은 70이 조금 넘지만 실제수명은 80을 훨씬 웃돈다. 그러니 10년 이상을 병으로 앓다가 죽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병을 안고 살아가는 마지막 생애에 평안한 삶, 존엄스런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료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복지적 도움이 절실히 요구된다.
노인들 10명에 8명은 병원에서 사망한다. 병원사는 이제 예외가 아니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드린다. 왜 그런 조류가 형성됐을까. 아마 현대의학의 모순일거다. 현대의학은 병을 고치는 게 지상 목표로 죽음은 될 수 있는 한 배제하려고 한다. CT, MRI 등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자연현상인 노화마저도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료과신에 대한 망상에 젖어 있다.
노인요양병원에 거동을 못하고 누워 있는 환자들이 많다.그분들은 하나같이 수액주사를 맞고 있고, 그 중에는 코를 통해 위로 연결된 줄(경비위관)이나 배를 째서 위속에 관을 넣어(위루술) 수분과 음식을 제공받고 있다. 이런 의료처치가 생의 마지막까지 행해져야 하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심장이 멎고 호흡이 끊어져야 의사는 사망을 선고할 수 있다.그러나 사람의 죽음은 입을 통해 먹지 못할 때부터 시작된다. 먹어야 개체의 세포들이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 받을 수 있다. 현대의술은 각 장기의 세포들이 더 이상 기능을 못하는 데도 인공적으로 수분과 영양을 공급해 주고 있다.
아주 옛적에는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옆에 물그릇을 놓아두었다고 들었다. 지금도 유럽의 어느 선진 국가에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환자를 집에 모셔와 거즈로 입술을 축여주며 임종을 지켜본다고 한다. 우리나라같이 무리하게 수액주사나 인공영양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끔 인공영양의 필요성에 대한 고민과 갈등도 일어난다.자식들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부모님을 살아 계시게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다. 불효자로 보이기가 싫다. 의사 또한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경관영양을 중지할 수 없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환자를 굶어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인공적 경관영양이 꼭 환자를 위하는 일만은 아닌 듯싶다.내가 요양병원에서 지켜본 사망한 노인들의 팔 다리는 온통 부어 있었다. 아마 그 분들의 허파, 심장, 간 등에도 물이 차 있을 것이다. 흡사 물에 빠져 죽은 모습 비슷하다. 과도한 수액을 죽음직전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얼굴 표정도 평화스럽지 않다. 소량의 물만 드시다 임종한 노인의 시신은 깨끗하다.생리적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런 죽음이 다가오면 몸속에서 화학물질인 엔돌핀이 나와 고통을 없게 해서 편안한 얼굴을 보인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의료가 아니다.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자연에 맡겨야 한다. 나날이 발달하는 의료기술은 죽음과 인간과의 관계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사망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도 줄여준다.
그래서 죽음은 더 무섭고 두려워진다. 현대인이 보다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찾도록 의료인을 포함하여 전 사회단체의 노력이 필요할 때다.
<천양곡/신경정신과 전문의/일리노이 주립정신병원 Chief Psychiatrist/시카고大 의대 정신과
임상강사 역임/시카고 중앙일보 전문의 칼럼니스트/서울대 의대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