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우체국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제가 맡고 있는 배달 구역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연방우정국이 운영비를 줄이기 위해 지금까지 3개의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배달 인력을 한 군데 커다란 우체국으로 통합해 운영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제가 일하는 브로드웨이 우체국, 그리고 차이나타운 지역을 관장하는 인터내셔널 우체국, 그리고 레이크 워싱턴 인근 지역을 관할하는 이스트 유니언 우체국 등이 '시애틀 아넥스'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우체국이 된 것이죠. 우리는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새 건물에 입주하게 됐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출퇴근 시간이 조금이나마 짧아졌고, 무엇보다 주차 걱정을 하지 않아서 좋기도 합니다. 원체 스트릿 파킹에 시달리던 제 자동차는 앞뒤 범퍼들이 조금씩 페인트가 까져 있거나 긁혀 있는데, 주차공간이 없는 브로드웨이에 스트릿 파킹 하려면 꼭 겪어야 하는 문제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주차 타워 안에 주차를 하니, 새똥 맞을 걱정도 없는 셈입니다. 거기에 시설도 꽤 좋고, 샤워 시설까지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건물이 원래 차량 유지보수를 하던 곳이어서 기름을 늘 뒤집어 쓰면서 일했던 우정국 내 정비부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 새 우체국 바로 건너편엔 시애틀에서 가장 큰 와인 전문샵인 '에스퀸'이 자리잡고 있고, 5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코스트코가 있으니 저같은 중증 와인쟁이에겐 편의가 커진 셈입니다.
그런데, 원래 우체국에서 꽤 떨어져 있으니 케이싱 작업을 마치고 메일을 트럭에 싣고 나서 배달지역으로 오는 것이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리고, 평일엔 아마 엄청난 교통량 때문에 귀환이 쉽지 않을 거란 불안감이 좀 들고, 무엇보다 퇴근길에 종종 즐기던 브로드웨이에서의 문화생활과는 아마 영이별이 될 거란 게 좀 마음에 걸립니다. 비노 베리테 같은 부티크 와인샵도 못 들르고, 퇴근길에 이곳에서 알게 된 친구 애덤이 운영하는 비스트로에 들어가 간단한 안주에 포도주 한 잔 하며 수다떨고 하는 것도 이젠 불가능해진겁니다. 일부러 제가 일 끝나고 집으로 가는 방향의 정반대인 브로드웨이로 찾아 올라가지 않는 이상. 때때로 제 배달구역의 손님들과도 만나 한잔 하곤 했는데, 이제 이런 잔재미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이 무거운 건, 제가 예전에 PTF (도제 우체부)로 일할 때 악명높았던 매니저가 바로 그 신설 대형 우체국의 국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오늘, 지금까지 우리와 동고동락하던 스캇이라는 마음씨 좋은 매니저가 이임하게 되는 것을 아쉬워하며 케이크를 잘라먹는 작은 파티를 가졌습니다. 그는 마음이 넓고 고와서 우체부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주어 우체부들은 그가 부탁하는 일이면 기꺼이 들어주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오버타임 지원자가 아니지만, 그가 만일 우편물 양이 많은 다른 우체부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우리는 늘 기꺼이 들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새 매니저가 된 백인 여성은 우체부들을 달달 볶는 것으로 유명했고, 이 여자 아래서 일을 해 본 우체부라면 거의 누구나 치를 떨었습니다. 저도 처음에 얼마나 굴렀었는지, 새로 매니저로 부임한 이 여자를 보자마자 예전의 그 기억들이 되살아올라 바로 입이 꽉 다물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늘 명령하고 고압적으로 굴던 이 여자가, 앞으로는 좀 어쩔려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체국 전체의 분위기가 이 한 사람의 부임으로 인해 벌써부터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보면 리더란 게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리더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내 처지에 귀기울여주고, 개선을 요구하는 상황이나 리더의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는 훌륭한 리더일 것입니다. 국가의 경우도 이런 리더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이고 자기의 권위로 명령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리더는 반짝 효율을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종국에는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었던 스캇은 이 자발성을 끌어낼 줄 아는 리더였습니다.
국가에도, 즉 정치에도 이런 리더가 필요할 것입니다. 자기 필요에 의해 사람을 선정하더라도 끝까지 의중을 숨기고 봉투에 담아 개봉하는 식의 밀실인사나 말로는 소통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양방소통이 아니라 '자기의 고집'만을 한 군데로 소통시키는 리더들은 결국 강압, 즉 압제로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 들게 마련입니다. 지금까지 소통을 이야기해 온 박근혜씨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녀가 과연 국민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하에서 무엇이든 이뤄지는 과정은 투명해야 합니다. 문재인 후보가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이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의 의사결정과정을 그대로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명박 정권 아래서 모든 것이 정의롭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이 과정을 무시한 점에서 잉태된 씨앗이고, 그것들은 결국 그들이 저질러 온 온갖 일들로서 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때부터 뿌려 온 부정의 씨앗을 틔워 내었습니다. 이것을 이뤄내는 모든 과정은 강압성을 띨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죽여 버립니다. 이른바 '창발성' 이 없는 민주주의가 말이 됩니까? 민주주의는 백가쟁명이고, 그것을 융합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모두 무시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작게는 우리 우체국 같은 조직에서도 그렇고, 국가란 조직에선 더더욱 그 창발성을 자극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멀리서 내 조국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것이 이렇게 아프고 답답합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