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러데이가 다가오면 상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진다.라디오에서는 종일 캐롤이 흘러나오고 TV에서는 매년 어김없이 ‘It’s a wonderful life’란 영화를 내 보내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나는 나이가 들며 감정이 메말라가는 느낌이 들어 지난 10년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O’Henry의 ‘Gift of Magi’를 읽어왔다. 잘 아는 이야기지만 상기(Remind)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소개해 본다.
1900년 초 뉴욕에 어느 가난한 젊은 부부가 살았다.크리스마스가 가까웠는데 그들에겐 서로에게 줄 선물 살 돈이 없었다. 남편은 8달라 주급쟁이고 아내는 수중에 단돈 1 달라 87센트 밖에 없었다. 아내는 생각다 못해 자신의 긴 머리를 짤라 판 돈 20달러로 남편이 소중하게 여기는 금시계에 달아줄 시계줄을 샀다.
한편 남편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물려받은 조상의 혼이 담긴 금시계를 팔아 아름다운 아내의 긴 머리를 빗겨줄 예쁜 빗 한 세트를 샀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수건으로 감싼 아내의 머리를 보았다. 아내도 남편이 그토록 아끼던 금시계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순간 두 부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세상에서 둘도 없는 선물을 받았다며 울먹였다.
할러데이 시즌이면 생각나는 어느 환자 이야기이다.결혼 15년이 되자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중년 여자 환자였다. 환자는 우울증으로 몇년을 고생하는 동안 정신병동을 수 차 드나들었다.
끝내 남편으로부터 강제이혼을 당하고 두 딸의 양육권마저도 빼앗겼다.어렵게 우울증을 극복한 환자는 세상 밑바닥에서 온갖 궂은일을 다했다. 어느 땐 끼니를 거르며 수많은 후회를 안은체 힘든 인생길을 걸어왔다. 언젠가는 딸들과 같이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성한 딸들은 환자를 만나주지도 않았다.감수성이 강한 사춘기 시절에 딸들은 어머니란 사람이 밥도 해주지 않고, 화장도 않고 집안에만 처박혀 가끔 죽어버리겠다고 소리쳤던 모습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다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오면 자기들의 어머니를 골방속의 어느 미친 여자로 말해 주었다.
그 후 20여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환자는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이번 크리스마스에 두 딸이 방문한다는 것이었다.환자는 언젠가는 딸들에게 물려주겠다고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이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환자를 키워주고 사랑해주던 할머니가 남겨준 중국제 찻잔들, 다른 하나는 자기가 시집올 때 가져온 예뿐 분첩이었다.환자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딸들을 만날 날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드디어 환자와 딸들이 만났을 때는 서로가 어색하여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잠간의 무거운 침묵이 지나자 딸들은 “엄마가 좋아하실 것 같아 가져왔어요”하며 조용히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그것은 두터운 앨범이었다. 그 앨범 속에는 수많은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재롱부릴 때의 사진, 생일파티에서 함박 웃는 사진, 유치원 다닐 때, 할로윈 때, 딸들의 학교 졸업식 때, 결혼식 때, 생전 보지 못한 손자 손녀들의 사진 등 등,사진 한장 한장을 들여다보는 환자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 이혼당할 때 아이들과 가족들의 사진 한 장 가질 수 없었는데 지금 이런 사진들을 보는 순간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가 되살아남을 느꼈다. 딸들이 어머니께 줄 선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진 전부를 복사해서 만든 앨범이었다.
딸들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에 대한 실망이 무척 컸다.그리고 어머니가 미웠고 싫었다. 이제 자기들도 성인이 되어 자식을 가져보니 어머니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딸들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기가 힘들었다. 한번 상처를 입으면 다시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다.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도 예외는 될 수 없다.어머니의 눈물은 딸들의 굳게 닫힌 마음을 움직였다. 오랜 동안 어머니를 미워한 세월은 실은 자신들이 괴로워했던 순간순간의 시간들이었다.딸들은 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어머니, 저희들이 잘못했어요.” 환자는 딸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아니야, 이 못난 에미를 용서해 다오.” 세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동안 흐느꼈다.
인간은 될 수 있으면 속마음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마음을 여는 게 두려워진다.그러나 마음을 닫고 있는 게 실은 마음을 여는 것보다 더 힘들다. 일단 마음의 문을 열면 복받쳤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할러데이에는 마음을 활짝 열어놓자.껄끄러운 인간관계가 있으면 툭 터놓고 이야기 해보자.그게 우리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카고 중앙일보 전문의(專門醫) 칼럼)
<천양곡:신경정신과 전문의/일리노이 주립정신병원 Chief Psychiatrist, 시카고大 의대
정신과 임상강사 역임/서울대 의대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