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불필요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들이 있다.그냥 있었으면 존경 받으며 여생을 보낼 사람들이 너무 스포트라이트 받는 무대에 올랐다가 이미지만 구기는 케이스들이다. 미국에서는 댄 퀘일 부통령이 좋은 예이다.
‘댄 퀘일’ 하면 20년이 지난 지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potato’이다.아버지 부시 대통령과의 재선 캠페인 중 초등학교 스펠링 경연대회에 참석한 그는 한 학생의 ‘potato’ 철자를 친절하게도 ‘potatoe’로(틀리게) 고쳐주었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철자법 틀린 것이 애교스런 실수였다면 두고두고 그를 야유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은 ‘머피 브라운 연설’이다. 1992년 5월19일 - 여성계는 날짜도 잊지 않는다.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퀘일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연설을 하면서 당시 인기 시트콤의 주인공 머피 브라운을 예로 들었다.
캔디스 버겐이 연기한 브라운은 40대의 지적이고 강한 성격의 뉴스앵커.이혼녀인 그가 싱글인 채 아기를 낳기로 한 결정을 퀘일은 맹렬하게 비난했다.무책임하게 아기를 낳는 것은 잘못이다.소위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이 아버지도 없는 아기를 낳다니, 프라임타임 TV가 이런 식의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 그로서는 백번 맞는 말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댄 퀘일이 누구 길래 아기를 낳아라 마라 하느냐”며 여성들이 들고 일어났다.남녀가 결혼해 안정된 환경에서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것이 ‘모범답안’이지만 그렇지 못한/그렇지 않은 가정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한 것이었다.
1992년 당시 결혼하지 않은 상태, 즉 법적 싱글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전체 출생의 30%에 달했다. 머피 브라운은 TV 속의 가공인물이 아니라 주변의 실제 인물이었다.33살에 연방 상원의원이 되면서 한때 공화당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퀘일은 이래저래 ‘멍청하다’는 이미지만 얻고 정치생명을 끝냈다.
싱글 여성들의 출산은 이후 계속 늘었다.2009년 기준 전체 출생의 41%가 소위 ‘아빠 없는’ 아기들이다. 30대 미만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면 이 숫자는 절반을 넘는다.혼외 출산의 도덕성을 따질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전통적 가정과는 다른 가정들이 급속히 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들 싱글 여성이 이번 오바마 재선 승리에 일등공신으로 꼽혔다.전체 투표자의 25%를 차지한 싱글 여성들 중 2/3가 오바마에게 몰표를 던졌다. 여성들, 특히 싱글 여성들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피임, 낙태, 남녀균등임금 등 이슈에 대해 공화당이 너무도 고집불통으로 외면하자 여성들이 집단으로 등을 돌린 것이다. 전통적 남성중심의 가치관에 대한 반란이다.
모든 익숙하지 않은 것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낯설어서 본능적으로,그 다음에는 기존체제가 흔들릴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여자가 머리를 짧게 자르다니, 여자가 어떻게 운전을, 여자가 술을 마시다니, 담배를 피우다니, 여자가 직장에?” 하며 놀라던 시절이 있었다.1920년대 미국의 신여성 ‘플래퍼’(flapper)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었다. 플래퍼는 원래 영국에서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 소녀들을 일컫던 말.
세계1차 대전 후 풍요의 시기에 미국에서는 ‘신종’ 여성이 등장했다.긴 머리에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집안에만 있던 어머니 세대와 달리 단발머리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재즈를 즐기며 남자들과 거리낌 없이 데이트를 하던, 당시로서는 자유분방한 여성들이었다.
여성 참정권운동과 맞물리며 여성이 자신의 권리와 역할에 대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기존의 관습과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미국사회에서 싱글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보인 첫 번째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반란’은 이제 표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초만 해도 오바마의 재선 성공가능성은 높지 않았다.어려운 경제로 국민들의 불만이 태산 같은 해에 현직 대통령이 재선되는 예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여성 표만 얻으면 이번 선거는 이긴 것이란 분석이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그걸 공화당은 실패했다. 전통적 원칙을 고집하느라 여성들의 현실적 필요에 눈감은 때문이다.
댄 퀘일의 ‘무책임한 출산’ 발언으로 여성들이 분노했던 1992년은 ‘여성의 해’로 기록되었다.그해 선거에서 사상 유례가 없이 많은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했다. ‘적법한 강간’ ‘강간으로 인한 임신도 신의 뜻’ 등 공화당 후보들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켰던 지난해도 ‘여성의 해’로 기록된다.연방 상원에 20명의 여성이 입성한 것은 미 역사상 처음이다. 여성들의 반란이다.
<권정희:주한국일보 논설위원/서울본사 외신부 기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