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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자서전’을 좀 훑어보다가 덮었던 적이 있습니다.10년 쯤 전의 일이죠. 책장 한 켠에서 먼지를 쓰고 있던 그 책을 다시 꺼내들어 살펴봤습니다. 리콴유는 큰 인물이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았는데 그런 제 생각에 변화가 생기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제 고정관념이 작용해서인지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존경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는 사람도 있는 거죠. 좀 심하게 비유하면 뱀장어에 기름까지 칠해놓은 듯 너무 매끈하고 화려해서 싫더라고요.
싱가포르와의 인연이 많았습니다. 기자였던 80년대 중반 첫 취재방문을 시작으로 청와대, 국회시절까지 다섯 차례 이 나라를 찾았습니다. 첫 방문 때 일입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신문인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에 “야당 세력 확대가 정국 불안 불러와”라는 기사가 1면 머리로 실렸습니다.
국회의석분포가 그 전까지 집권당 99대 야당 1(전체의석수 100)이었는데,당시 총선에서 야당 의석수가 2로 늘었던 것이 그 기사의 근거였습니다. 야당 의석수가 두 배로 늘었으니 민심이반이고,
그 때문에 정국이 불안해진다는 것이었을까요.
솔직히 “뭐 이런 나라가 있어”라는 탄식이 나왔습니다.충북 크기에 3백만 인구라는 왜소함은 ‘인형 같은 도시국가’에서의 ‘리콴유 식 현인정치 실험’이라는 판단과 함께 홍콩, 대만과 묶어서 ‘나라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미리 내리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작년 총선에서 야당 의석수가 6석으로 대폭(?) 늘었으니 싱가포르 언론들은 이를 어떻게 다루었을지 궁금합니다.
싱가포르 첫 방문 때 그 유명한 ‘벌금의 나라(Country of Fine)’의 실체를 곳곳에서 목격하던 중 정말 무릎을 치게 하는 기막힌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한 아파트를 찾아갔는데 승강기 내부에 CCTV가 아닌 카메라 렌즈가 보였습니다. 물어보니 ‘오줌감지기(Urine Detector)'라는 것이었습니다.
규제와 벌금 속에 살다보니 스트레스가 폭발직전이 된 사람들이 승강기에 혼자 타게 될 경우 ‘에라 모르겠다’하고 오줌을 갈겨버리는 사례가 너무 잦아서 이를 막기 위한 조처로 감지기를 달았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었습니다.사람 사는 것, 느끼는 것은 세상 어디나 비슷하고말고. 벌금 왕국이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암을 다량으로 선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뒤 몇 차례 방문 때 보니 오줌감지기는 철거되었더군요.
몇 해 전 마이클 페이라는 미국의 한 청소년(당시 18세)이 싱가포르를 찾은 길에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스프레이 페인팅으로 담벼락을 장식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싱가포르 법원은 공공질서 위반혐의로 그에게 ‘태형 6대’를 판결했습니다. 미국은 특사를 보내 긴밀한 협의 끝에 ‘태형 4대’로 형을 낮췄습니다.공공질서 위반에 대해 태형이 있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가 싱가포르 아닐까요.
21세기 문명국가에서 발가벗긴 채 기둥에 붙들어 매고 정복경찰관이 엉덩이에 곤장을 때리는 모습(인터넷 보시면 이 사진이 생생하게 나옵니다), 상상을 불허하는 괴기한 그림입니다. 보통 서너 대를 맞으면 뻘건 곤장자국과 함께 피가 난다고 합니다.
작년 말 싱가포르의 야권은 미국 예일대가 싱가포르에 분교를 내려하는 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야권은 “노조도 최저임금제도 없는 나라에 미국의 대표적 상아탑인 예일대가 웬 분교냐”며 “싱가포르 정부의 뜻대로 학내에서 정치적 행동이 제한되고 표현의 자유도 금지된 캠퍼스를 세우는 것이 타당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예일대는 싱가포르 국립대(NUS)와 손잡고 올 8월부터 예일-NUS 캠퍼스를 운용할 계획입니다.자유와 지성의 상징인 예일대가 이런 반발 속에 어떤 결론을 내릴지 눈길을 끕니다.
알란 셰드레이크라는 영국작가는 재작년에 싱가포르 사법부를 비판하는 책을 냈습니다.그는 명예훼손혐의로 구속됐고 6주간 수감됐으며 미화 1만5천 달러의 벌금형도 병과됐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발끈했죠. 표현의 자유를 파괴한다는 거죠.
명예훼손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민사소송으로 다루면 되지, 왜 인신을 구속하는 형사로까지 다루냐는 강력한 항의였습니다. 물론 싱가포르 정부는 별다른 답이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싱가포르의 장점과 큰 성취를 높이 평가합니다.‘아름다움’보다는 ‘효율성’이 더 어울리겠지만 말이죠. 리콴유의 위대함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특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모든 언론이 정부통제를 받고, 인터넷에 정부비판이라도 하면 바로 경찰이 달려오는 나라. 언론자유도가 최하등급인 ‘언론통제국’으로 분류되는 나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권 탄압국가. 그런 싱가포르를 설계, 운영, 제조한 리콴유에게 저는 박수만 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리콴유-리센룽 총리로 이어지는 권력세습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아주 우울해집니다.그렇습니다. 눈을 잠깐 돌리면 여기저기가 다 세습 아닙니까. 북한, 일본, 중국, 한국. 싱가포르도 그런 세습권의 한 축을 차지하거든요.
제가 그 칭송받는 리콴유라면 설혹 제 자녀가 저보다 더 뛰어나 보이더라도 총리를 승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야 천하의 리콴유인 거죠. 거칠게 비판하는 목소리 중엔 ‘싱가포르와 북한의 차이는 잘 살고 못살고 밖에 없다’는 것도 있습니다.감옥을 아무리 호텔같이 꾸며 봐도 감옥은 결국 감옥이니까요.
싱가포르에도 변화는 오고 있는 듯합니다.작년 선거 때 집권당 토니 탄 대통령이 당선은 했지만 꽤 고전했습니다. 집권당 의석이 90%를 넘지만 지지율은 60%대로 떨어졌습니다.리콴유는 이런 변화에 대해 통탄하고 있지만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곧 다시 싱가포르에 가보고 싶습니다.
<김기만:우석대, 군산대 초빙교수/동아일보 파리특파원, 청와대 춘추관장,국회의장 공보수석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