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영화채널 TCM에서 ‘Scarlet Street'이라는 흘러간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다.험프리 보카트와 함께 헐리웃 갱영화를 주름잡던 에드워드 로빈슨이 주연한 영화로,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진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공인회계사 겸 아마추어 화가인 크리스(에드워드 로빈슨)는 젊은 창녀를 사랑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그림에서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박력 있는 붉은색과 노랑색등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해 과거 어두운 칼러의 그의 그림에서 180도 탈바꿈 한다. 노인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달라지는가와 이로 인해 얼마나 판단을 그르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남자들이 노인이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역할상실로 인한 고독이다.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무기력과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아내마저 남편을 냉대하면 가정에서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때 젊은 여성이 나타나 “당신을 존경 합니다. 당신을 사랑 합니다‘라는 식으로 나오면
눈이 완전히 멀어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미국의 플레이보이로 불리는 휴 헤프너가 자신보다 60세 연하인 젊은 모델과 결혼했다.헤프너는 87세이고 신부는 27세다. 늙은 신랑과 젊은 신부는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곤 했다.
미국은 사랑을 강조하는 문화의 나라다. 그런데 사랑 사랑하면서 이혼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으니 웬일일까. 사랑만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사랑이 지니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석 달 사랑하고, 3년을 싸우고, 30년을 참고 사는 것이 부부라는 서양속담도 있지 않은가. 변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사랑도 변한다. 변하는 것에 생명을 거니 마지막이 허무할 수밖에.
늙은 부부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정이다.신선한 보졸레 보다 숙성된 캐버네 세비뇽과 같은 포도주 맛이다. 나이든 부부의 행복 필수조건은 ‘상대방 인격존중’이다.서로 존경하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어있다. 중년이나 노인부부에게는 사랑과 존경이 동의어다.
휴 헤프너의 여성편력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는 어느 대학교수의 저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돈 있지, 늘씬한 몸매의 애인 있지, 저택 있지 뭐 부러울 것 없고 아쉬울 것 없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헤프너는 근사해 보이고 부러웠는데 87세 된 그가 아직도 젊은 여자 그것도 60세 연하의 여자와 결혼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모습은 보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다. 87세면 “어떻게 죽어야 하나”의 답을 구해야 할 나이인데 젊은 여자와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삼고 있으니 실망스럽다.
휴 헤프너는 자신이 창간한 ‘플레이보이’ 잡지를 통해 청교도 문화에 젖어있는 미국에서 성 개방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다. 킨제이보고서를 구체화 시킨 성해방 운동가다. 그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미국의 아이콘이다.
그런 그가 막판에 보여준 것이 ‘인생의 목표는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는 쾌락주의를 시범 보였다는 것이 문제다. 평생을 미녀 속에 파묻혀 산 휴 헤프너 정도면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사람은 마지막에 이렇게 살아야 되는거야”하고 깜짝 놀랄만한 조커를 내놓을만한데, 붉은 파자마가운을 입고 손녀와 같은 여자와 손잡고 있는 모습은 성해방 운동가가 아니라 쾌락의 노예가 된 노인처럼 보여 추하다.
<이철:미주한국일보 고문/전 주필,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