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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을 말춤에 빠져들게 만든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이어 '소녀시대'의 정규4집 ‘아이 갓 어 보이(I Got a Boy)’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국내 음악 차트 1위를 휩쓰는 막강 파워를 앞세워 대만,싱가포르 1위를 석권하는등 아시아 정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빌보드,롤링스톤즈,타임지의 집중 조명속에 유튜브 조회수 3000만을 초고속으로 넘어 오대양 6대주로 질주하고 있다.
K-POP이 말 그대로 전성시대로 진입하면서 한류의 세계 지배가 꿈이 아닌 현실로 우리앞에 다가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이처럼 지구촌을 열광의 블랙홀로 빠져들게 만든 한류의 견인차 K-POP이 가공할 문화 핵펀치로 위상을 구축하게 된데는 '이수만'이라는 예술적 연금술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K-POP의 설계사이자 조련사,전도사이면서 한류의 영웅으로 통하는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61)회장의 선견지명과 음악적 열정,시대적 문화 트렌드를 꿰뚫는 통찰력,치밀한 창조적 기획력과 문화산업형 경영리더십이 없었다면 한류의 노른자위 K-POP의 융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로부터 바통을 넘겨 받아 세계만방으로 폭풍질주하고 있는 '소녀시대'를 비롯하여 K-POP으로 한류 세계화의 주력 선봉으로 천하에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HOT' 'SES' '신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EXO' 등 한류스타들을 키워낸 한류문화 K-POP의 산실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의 치열한 예술적 삶을 기록한 '이수만 평전'(정보와 사람.824쪽.값 2만4천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K-POP 육성을 통해 우리의 대중문화를 한류라는 트렌드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문화로 꽃 피운 이수만 회장의 헌신과 영웅적 공로에 깊은 관심을 공유하던 출판사 <정보와사람> 안윤태(49)대표와 인터넷 정치평론으로 널리 알려진 공희준(44)정치평론가가 공동집필한 '이수만 평전'은 이수만회장과 SM, 그와 힘을 합쳐 연예산업을 일궈온 사람들과 관련된 일대기이자 연대기식의 보고서다.
행복,슬픈 마네킹,더 보이즈 세파트로 구성된 '이수만 평전'은 이수만 회장의 인생역정과 대중문화 창달에 기여한 업적,SM성공신화,한류의 선구자,전도사가 되기까지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한국전쟁으로 금수강산이 포연으로 자욱하던 1952에 태어난 이수만 회장은 대학시절이던 1971년 ‘4월과 5월’이라는 남성 듀엣으로 출발하여 75년 ‘모든 것 끝난 뒤’, 76년 ‘한 송이 꿈’, 77년 ‘파도’, 78년 ‘행복’ 등을 연이어 히트시켜 76년 MBC 10대 가수 남자신인상, 77년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며 톱 가수에 오르는 등 잘 나가던 가수이자 순발력 좋은 방송 진행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스타의 길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1981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떠났다가 MTV가 몰고 온 문화적 현상에 크게 감명을 받은 나머지 1985년 귀국해 새로운 형식의 뉴에이지 음악을 만드는 일에 뛰어든게 한류 전도사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수만회장이 유학을 마쳤을 때 미국인 평균소득의 두 배가 넘는 초임 연봉의 편안한 일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수만회장은 MTV에서 얻은 영감에서 비롯된 통찰력과 확신감에 그것을 마다하고 험난한 가시밭길로 나섰다.
이수만회장이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교시절 교내행사에 보았던 당시 인기절정의 인기가수 임성훈과 최병걸에 대한 동경과 선망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SM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약 20년이 흐른 1989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검증되지 않은 새내기 음반제작자의 한 사람일 뿐이었지만 창업 직후 그는 원조 아이돌 스타 현진영을 키워내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일약 연예산업게의 기린아로 떠 올랐다.
그러나 그와같은 성공도 잠시 그는 현진영을 유혹의 마수로부터 지켜내지 못했고, 이후로 잇단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그가 실패의 늪에서 탈출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한 것은 1996년 H.O.T를 데뷔시키면서였다.
이수만회장은 H.O.T를 젊은층의 우상으로 떠 받들여질만큼 인기 정상으로 올려 놓은 것을 시작으로 S.E.S, 신화를 인기그룹으로 연이어 성공시키자 국내시장에서의 성공을 지렛대 삼아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는 H.O.T, S.E.S, 신화 등 내로라하는 인기 보증수표들이 벌어들인 수익을 일본 시장 개척에 쏟아 붓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때 이수만회장이 일본 시장 개척의 첨병으로 내세운 비장의 무기는 15세 소녀 보아였다. 그는 3년간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보아를 일본 활동에 적합한 가수로 조련하였다. 그러나 한국 출신 가수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사례가 극히 드물었던 시절인 터라 10대 소녀 보아를 일본에 진출시킨다는 그의 발상은 대단히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일본 활동 초창기의 보아는 일본 대중음악시장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과 시련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보아는 이회장의 치밀한 프로그램과 그녀 스스로 일본 시장의 밑바닥을 훑고 다니는 집념과 근성 있는 자세로 성장의 발판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갔다.
결국 보아는 배용준이 욘사마로 불리기 일으키기 이전부터 이미 SM발 한류를 도쿄 거리에 퍼뜨리는 문화 외교관 역할을 해내며, 감동적인 무대로 일본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끝에 불과 일본 진출 2년 만에 일본 음악시장을 삼키는 괴력을 보여줬다.
보아의 성공으로 한류 교두보를 마련한 이수만회장은 곧장 동방신기를 일본열도에 상륙시켰다. 일본땅에 발을 디딘 동방신기는 보아가 걸었던 고난의 길을 따라서 일본시장을 개척해갔다. 동방신기는 탁월한 재능으로 얼마 안가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일본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동방신기는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시장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동방신기와의 계약문제가 돌출하면서 이수만회장은 멤버들 가운데 세 명을 잃고 한동안 실의에 빠졌지만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EXO가 차례로 성공하면서 이수만회장은 다시 의욕을 되찾게 된다. 이 팀들은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와 소통과 대화의 중심채널이 된 SNS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하면서 SM 엔터테인먼트가 전 세계로 급속히 그 영향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시금 부흥기를 맞은데 고무된 이수만회장은 2012년 여름 SM이 전 세계 70억 명의 인구를 거느린 가상 국가(Virtual Nation)를 목표로 나아가겠다는 방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SM의 성공에서 비롯된 자신감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이수만회장은 이처럼 SM이 문화산업에서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CT, 즉 Culture Technology(문화 기술)를 꼽았다.
그는 CT를 전문적인 문화예술인을 키워내 시장에서 평가받는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그가 이끄는 SM 엔터테인먼트는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마케팅으로 이어지는 체계화된 프로세스의 구축을 통해서 이러한 CT를 성공적으로 구현해왔다.
이수만회장은 전근대적이고 주먹구구식으로 꾸려져온 한국의 문화산업을 첨단화하고 세계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SM 엔터테인먼트를 연예계 최초로 코스닥시장에 진입시키는 개가를 이룸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문화 기획자로서의 입지를 한층 더 공고하게 다졌다.
그러나 돌고도는 인생이라는 말처럼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기 마련이었다.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SM 엔터테인먼트를 코스닥에 등록시키기 전에 있었던 내부 거래로 인해 공금 횡령 혐의를 받고 법의 심판대에서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수만회장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었다. 그는 그 오점을 만회하기 위해 미래를 향해 대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