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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吳)나라 왕 손권,고구려을 초원세력을 통제관리한 우두머리(선우) 국가로 인정
지나인들은 지나사에서 단군족의 줄기로 대홍안령 산맥에서 수렵생활을 하다가 단석괴 대인을 중심으로 결집한 후에 강성해지자 지나북부로 남하한 선비족이 주축이 되었던 5호 16국이 지나대륙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지나족이 아니라고 여기는 단군조선족의 갈래인 북방 기마족이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5호 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족이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 국경지역을 자주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고구려 2대 유리왕 때 부분노를 사령관으로 삼아 정벌하고 복속하여 부용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고구려가 북방 기마족의 맹주 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에 속하는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거란을 복속하여 제후국으로 삼았고,중원을 차지하며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국원왕의 왕후와 태후,그리고 고구려 백성 5만을 인질로 끌고 갈 만큼 고구려에 치욕을 안겨 주었던 모용선비족(연)을 광개토태왕 시기에 정벌,복속하고 고구려 유민 고운을 왕으로 삼아 제후국으로 삼았으며, 고구려사에서 최장 거리에 해당하는 감숙성 지역의 토욕을 정벌하고, 북위 수도에 고구려인 45만명을 이주시켜 초원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던 탁발선비족의 북위를 제압하여 북위가 수도를 이전할 처지가 될 정도였고, 장수왕이 사망한 시기에는 북위왕이 구걸하여 북위왕의 왕비로 보낸 고구려 귀족의 딸이 낳은 북위왕이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사당까지 지어서 자신의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게 하였을 정도로 고구려 제후국으로서의 제후의 예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초원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그야말로 선우로 대변되는 초원세력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는데 지나국의 한 사료가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주고 있다.
한나라가 망한 후에 지나대륙이 오·촉·위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 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 황제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 7년(234),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파견한 일이 있다. 이 때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을 초원을 지배하는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單于)’라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3년 오(吳)의 손권이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가서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해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 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나라로 돌려 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책봉하고 예물을 보낸 것이다(책봉이란 정식 수교(修交)의 외교적 관례로 주종 상하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국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견사자사굉(遣使者謝宏) 중서진순(中書陳恂)
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가사의복진보(加賜衣服珍寶)
그러나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나라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한다.
그러나,[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동천왕 편]의 기록이 증명하고 있듯이 관구검을 격파한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관구검을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관구검 군대는 대패하여 돌아 가거나 동해안을 따라 신라땅으로 들어 가 신라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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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지나대륙과 동아시아를 지배한 중심국가였다
고구려가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기마족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특성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흉노가 지나국과 끊임없이 혈투를 벌여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700여년간 지나세력과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 나갔던 것이다.
지나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초원세력까지 통제관리했던 우두머리 국가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반증한다.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이, 현재 지나국이 고구려사를 지나국의 변방사로 끼워 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지나인들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해민족의 터전인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구려는 기마.수렵민족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기할 것은 단군조선의 줄기에 불과한 흉노족은 코카서스 인종과 피를 섞은 혼혈족으로서 단군조선(부여)을 국통맥이나 황통맥으로 계승한 고구려와는 문화나 무덤양식에서 다르다는 사실이다.
선비족이 초원을 지배하는 4-5세기 선비족에 흡수된 흉노족이 고구려 정벌에 동원되었다가 고구려 북부전선에서 패배하고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 유입되어 부여계 박혁거세의 사로국을 무너 뜨리고 신라왕조를 세운 오리지날 투르크계(백인과 혼혈) 흉노족 얼굴이 김태촌의 얼굴형이다.
우선 적석목곽분은 흉노 등 북방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인데 한반도 지역에 거주한 토착 마한인들이 사용했던 적석총(피라미드) 무덤양식을 수용한 고구려에서는 이런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어 시체와 부장품을 안치한 후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지국, 그리고 일본에는 없는 무덤 형태이다. 북방 기마민족이 후대까지 견지했던 순장(殉葬)의 습속도 고구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에서는 발견되고 있다. 이는 유라시아 초원세력의 뿌리가 만주를 터전으로 하는 단군조선(부여)에서 나왔으며, 고구려는 해민족의 토착족으로서 마한인들의 문화와 무덤양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또한 고구려의 국조가 봉황으로 이는 오리지날 한반도의 꼬리 긴 토종닭의 토템이다.
한반도를 모태로 만주를 중심으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서 활동했던 해민족이 환경적 차이 때문에 모두 똑같은 습속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적석(피라미드)문화나 하나님 신앙같은 문화는 공통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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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이후 황궁씨와 유인씨를 이은 환인씨가 세운 12환국연방과 관련하여 [환단고기]에는 "천해 동쪽 파나루산 아래 환국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해란 어디인가? 바로 바이칼 호수를 의미한다. 천해 동쪽이라고 했으니 중앙 아시아 지역은 해당이 안 되는 것이다. 천해 동쪽은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확히 천해 동쪽 파나루산 아래라고 지정을 했으니 바이칼 호수 동쪽의 파나루산은 환인시대에 해당하는 1만년에 가까운 문명이 숨쉬고 있는 대홍안령 산맥 밖에 없는 것이다. 선비.거란 등 고구려를 침략하여 약탈하는 초원세력을 정벌하기 위해서 유리왕과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넘었을 대홍안령 산맥 아래 지역이라고 했으니 단군조선과 부여,그리고 고구려의 본향인 만주 밖에 없는 것이다.
왜 [환단고기]를 운운하면서 [환단고기] 기록내용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날조해서 해석들을 하는 것인가? 천산도 중앙 아시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홍산문명이 일어난 만주지역에서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래서 황궁씨가 떠난 북쪽지역 천산은 바로 만주지역의 천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위치상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지역이 마고성이 되는 것이다.
옛부터 서남해 지역의 무당(당골래)들은 거의 여성들인 배경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고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이면서 사람들의 마음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무당이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심리 치료사인 것이다. 마고 이후 1만년에 이르는 우리 해민족사의 시조님들이 되는 환인이나 환웅,단군도 모두 무당이면서 제사장들이였다.
인류문명이 빙하와 눈 덮인 설산지역이나 사막이나 초원 등 인류가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이 천박한 지역에서 발달하는 줄 아는가? 한반도 지역과 같이 고대에 아열대 기후지역이였던 따뜻한 온대지역에서 발달한다는 사실을 왜 부정하려는 것인가? 홍산문명은 다 서남해 중심의 한반도 마고문명의 줄기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고고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고. 예컨대, 홍산문명의 특징이 옥문화인데, 홍산지역의 옥유물보다 출토 연대가 훨씬 이른 1만년 전까지 올라 가는 지역이 창조신을 마고 할미로 삼고 있는 제주도 지역인 것이다.
거석.해양.태양(해)문명을 특징으로 하는 1만년 전 태평양에서 사라진 마(무) 대륙문명과 관련있는 해저 피라미드도 모두 서남해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고대 서남해인들이 항해를 할 때 태양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비상하는 용왕신 또는 바다의 여신으로서 제사지낸 마고는 태평양 마대륙의 생존집단을 이끌었던 여성 제사장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남해 해저에는 바다가 되기 1만년 전에 해당하는 마고문명이 존재하고 있다라고 고고학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