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뒷들의 나무에는 색 바랜 잎들이 달려있지만 밖은 온통 겨울 냄새로 가득 차 있다.게다가 살포시 내린 엷은 첫 눈이 겨울의 정서를 한끝 돋우어 준다. 달랑 한장 남은 달력이 무언가 말을 할 듯 내 눈과 마주친다.
‘금년에도 장미 빛 이상과 냉혹한 현실 사이를 그런대로 잘 헤쳐 나왔군.그런데 지발 세상 모든 것을 거의 알아차린 듯한 늙은이 행세는 하지 말게나.’
아마 내게 이렇게 말했을지 모르겠다.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과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인생살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가끔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도 있다. 이제 겨울의 길목에서 조용히 지구촌을 떠난 어느 환자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빅맥에 얽힌 사연이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와서 양키 모자를 쓴 노인네 식당( 나중에 알고 보니 켄터키 프라이 치킨)에 들러 닭고기를 먹어보았다. 그 때 한국에서 먹었던 통닭구이 맛 하고는 영 달라 그냥 버리고 나온 일이 있다.
그 뒤에 먹어본 맥도날드의 빅맥은 맛이 고소해서 그런대로 괜찮았다.빅맥은 시카고 근교에 본부를 둔 맥도날드의 대표적 햄버거로 세계 곳곳의 서민층이 즐기는 미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음식 중의 하나이다. 지금이야 사정이 다르지만 20세기 후반이 시작할 때까지도 일본의 경제성장은 놀라웠다.
당시 미국은 어떻게 하면 일본을 따라잡을까 고심 끝에 코카콜라, 블루진, 맥도날드를 그곳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기대이하의 반응이 나타나자 ‘일본에 법과대학이 열개 이상 더 생겨 변호사들이 많이 배출되면 한번 해 볼만도 한데’하며 한숨을 쉬었다는 농담도 있다.고소한 빅맥도 외부 음식문화를 대하는 일본인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출근했더니 간호사가 진료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무엇이 잘못 되었구나 속으로 중얼 거리는데 ‘Dr, C, Beth가 어제 저녁에 죽었대요. 갑자기 보트에서 넘어졌는데 심장마비였대요.’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살은 아니니 일단 한숨 놓았다.
엘리자베스(가명)는 50대 여자로 오랫동안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아왔는데 요 근래 증상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 치료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이민 온 가난한 부모 밑에서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두 서너 달 웨이트레스로 일한 것을 빼고는 이제까지 정상적인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다. 이성관계도 원만하지 못해 독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심한 우울증도 앓았다.
엘리자베스 증상 중의 하나는 비행기 공포증이다.비행기가 자기만 찾아 날아다니다가 언젠가는 자신의 머리위로 추락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비행기가 한 대 이상 날아다닐 때는 자기들끼리 서로 레이더로 연락하여 그녀를 찾아낸다고 한다.그런데 그녀가 배(ship) 안에만 있으면 이상하게도 비행기가 따라오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집 근처에 있는 리버보트(강물에 떠다니는 노름 배)에 가 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또 하루 한 끼는 꼭 빅맥으로 때웠다.어쩌다 고급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에도 맥도날드에 들려 빅맥을 먹어야 속이 풀렸다. 언젠가 엘리자베스에게 왜 그렇게 빅맥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첫째, 어릴 적 처음 먹었을 때의 맛을 못 잊어서.
둘째, 노란색의 맥도날드 로고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 했다.
환자의 입관예배에 참석했던 간호사는 그녀가 누워있던 관 속에 금빛 나는 맥도날드 M 로고와 빅맥의 그림, 그리고 모형 비행기가 있었다며 웃었다. 의사는 결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장해 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의사들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들이 생사여부를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과대망상 적 생각을 가지고 있어 환자가 사망할 때마다 나르시시즘에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필자 또한 엘리자베스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랜 기간 동안 치료를 받아왔기에 마음 한 구석이 훵 뚤린 듯 허전했다.
죽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수많은 책과 논문들이 나와 있다.어떤 이는 그 방면에 대가인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죽음 학은 인간의 학문이 아니라 창조주의 소관이다. 장례식에 가면 성직자들이 죽은 이들의 혼을 위로해준다.
혼은 무엇일까? 라틴어의 Spiritum이란 어원에서 나왔고 지금은 Spirit으로 사용되고 있다.과학자와 의학자들은 옛 부터 우리 몸의 어딘가에 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주 옛날에는 심장에, 다음에는 횡경막(phrenom)이나 흉선(Thymus)에, 그 다음에는 뇌 속에, 데카르트는 뇌중에도 뇌의 한가운데인 송과선(pineal gland)에 있을 거라 추측해서 Broken heart(실연), Schizophrenia(정신분열증), Dysthymia(우울증 성격)이란 말이 생겨났다.
죽음은 인생항로에서 피할 수 없는 생의 종착역이다.엘리자베스는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리버 보트에서 빅맥을 먹은 뒤 세상을 떴다. 금빛 나는 M로고, 빅맥, 모형 비행기를 혼 위에 태우고 우주를 날아다닐지 모른다.
엘리자베스의 아이러닉한 죽음을 생각하며 ‘죽음이란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살이의 결실을 맺는 열매이다.’ 란 심리학자 에릭슨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는 주어진 수명만큼 살기를 원하지만 전쟁, 범죄, 천재지변, 마약 등이 날뛰는 금세기에서는 그렇게 되기가 힘들다.
엘리자베스는 그래도 자신의 수명대로 살았다. 우리도 가능하면 사고사, 자살, 타살이 아닌 자연사 사망확인서를 가지고 지구촌을 떠나는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천양곡/신경정신과 전문의/일리노이 주립정신병원 Chief Psychiatrist, 시카고大 의대
정신과 임상강사 역임/서울대 의대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