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이메일로 짧은 동영상을 하나 받았다. 제목은 ‘빈 피클 병’.우리에게는 ‘빈 김치병’이라고 하면 더 친근할 것이다. 이런 내용이다.철학 교수가 강의실에 빈 유리병을 들고 들어왔다. 교수는 유리병에 골프공을 가득 집어넣고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병이 가득 찼는가?” 학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교수는 이어 작은 조약돌들을 유리병에 부었다. 돌들이 골프공 사이사이의 빈 공간을 채웠다.교수가 물었다. “병이 가득 찼는가?” 학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그러자 이번에는 교수가 모래를 병에 쏟아 부었다. 골프공과 돌맹이로 가득 찬 것 같았던 유리병 구석구석으로 모래가 흘러 들어가 빈틈을 메웠다.
교수가 말했다. “이 유리병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이다. 골프공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조약돌은 그 다음 중요한 것 그리고 모래는 나머지 자잘한 것들이다. 유리병에 모래부터 채우면 골프공이나 조약돌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각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라는 내용이다.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부차적인 일들에 쏟다보면 삶은 계통을 잃고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말이다.
새해가 되니 또 등장하는 것이 새해결심이다.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빼고, 매일 운동을 하고,담배를 끊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일기를 쓰고,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 모두 좋은 결심들이지만 지엽적이다. 삶의 지류들이다. 올해는 보다 근원적인 것, 삶의 본류를 대상으로 새해결심을 하면 좋겠다. 인생의 우선순위에 근거한 결심, 인생의 유리병에 ‘골프공’을 제일 먼저 채우겠다는 결심이다.
‘마지막 강의’로 유명한 랜디 포시 교수는 같은 제목의 책을 남겼다.한시간 강의로 못 다 한 이야기들을 책에 담은 것이다. 카네기멜론 대학 전자공학과 교수였던 그는 40대 중반이던 2006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2008년 여름 사망했다. ‘마지막 강의’는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 삶을 돌아보며 인생을 잘 사는 법을 정리한 내용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시간의 제한성과 가족이다.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분명한 것은 가족들과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라며 그는 6살, 3살, 18개월의 삼남매에게 아빠로서 삶의 나침반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것, 속 썩이는 10대 자녀의 아빠노릇을 해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생의 마지막, 금쪽같은 시간을 들여 ‘마지막 강의’를 준비한 것도 사실은 아이들이 자라서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자료를 남기려는 의도였다.책 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포시 부부는 항상 집안 치우는 문제로 토닥토닥 다투곤 했다. 그는 잔뜩 어질러 놓는 버릇이 있고 아내는 그게 못 마땅해서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가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되면서 그 다툼이 멎었다. “마지막 시간들을 바지 걸어놓지 않았다고 싸우면서”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작은 일들로 관계를 망치지 말라는 불치병 환자·가족 카운슬러의 충고를 따랐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시한부’ 인생이다. 남은 시간의 길이가 다를 뿐이다.그런데 그 제한된 시간을 우리는 종종 자잘한 일들로 낭비한다. ‘바지 걸어놓지 않은 것’을 두고 싸우느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치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흔한 모습이다.인생의 유리병을 허접 쓰레기로 채우는 결과이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이렇게 분명한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탐진치(貪瞋癡),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도 파레토 법칙을 적용해볼 필요가 있겠다.20세기 초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이탈리아에서 20%의 부자들이 80%의 부를 차지하고 있다며 부의 불공정한 분배를 지적했다. 여기서 80/20 법칙이 유래한 후 거의 모든 사례에 단골로 적용이 된다.
예를 들어 어느 가게의 매상의 80%는 20%의 단골에게서 나오고, 직장 내 우수인력 20%가 업무의 80%를 수행한다는 식이다. 인생에서도 가장 소중한 20%에 시간과 에너지의 80%를 쏟는 것이 잘 사는 비결일 것이다.
내 인생의 ‘골프공’을 찾아야 하겠다.그게 없으면, 그걸 망치면 내 인생의 의미가 사라지는 그것은 무엇인가.가족, 건강, 친구가 우선 꼽힌다. 생의 여정을 동행하는 인연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생을 이어갈 건강만큼 필수적인 것도 없다.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권정희:미주한국일보 논설위원/서울 본사 외신부기자 역임/숙명여고~서울대 사대 불어교육과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