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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周恩來)는 1975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한 태국의 쿠크리트 프라모이 총리를 통해 나에게 중국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을 해왔다. 나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해 9월, 내가 이란을 방문하여 테헤란에서 팔레비 국왕과 회견을 가졌을 때 호배이다 총리를 통해 저우언라이의 초청장을 다시 받게 되었다.호배이다 총리는 시간이 없으니 속히 답변을 해달라고 덧붙였다.당시 언론에서는 저우언라이가 병으로 장기간 병으로 입원하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중국을 방문키로 했다.저우언라이는 그러나 내가 방문시기를 1976년 5월로 결정하기 전에 서거했다. 당시 싱가포르와 베이징 사이에는 직항노선이 없었다. 나는 우선 홍콩으로 날아가 거기서 기차로 중국 국경까지 간 다음, 거기서 걸어서 국경을 넘어 광동성(廣東省)행 특별열차를 탔다.그날 오후 나는 영국제 트라이던트기(機)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환영행사가 준비되어있었다. 인민해방군 음악대가 싱가포르와 중국 국가를 연주했다.나는 육해공군 의장대를 사열했다.덩샤오핑(鄧小平)은 지방에 은둔(연금 상태를 뜻함/방장 주)상태여서 베이징에는 없었다. 나는 화구펑(華國鋒) 총리의 영접을 받았고 5월 10일 밤에 열린 공식국가만찬에 참석했다.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모두 7시간에 이르는 공식회담을 가졌다.5월 12일 화궈펑과의 두 번째 회담이 열리기 직전,중국의 의전관이 갑자기 영빈관에 달려오더니 마오쩌둥(毛澤東)주석이 우리를 만나려 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통상적으로 중국 정부는 중국을 방문한 중요 인물에게 주석과의 면담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문자들을 면밀히 살펴본 다음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주석에게 보고한다.방문자는 그제야 ‘위대한 지도자’와의 회견이 있다는 신호를 받게 된다.
아내와 딸은 이유도 모른 채 서태후의 하궁(夏宮)을 관광하던 도중에 불려오게 되었다.나와 아내 그리고 딸, 라자라트남 외무장관과 혼 수이센 재무장관, K.C. 리 문화장관 이렇게 여섯 명은 자동차로 마오쩌둥의 자택으로 안내되었다. 차량행렬은 인민대회당 반대편에서 천안문 광장 근처의 중난하이라 불리는, 벽으로 에워싸인 구역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검은 칠을 한 문을 지나 호수 가에 중국풍의 낮은 건물들이 늘어선 구역으로 들어갔다.자동차는 그중 한 저택 앞에 멈춰서고 우리는 그 안으로 안내되었다. 옅은 회색 인민복 차림으로 두 명의 여성 보좌관을 거느린 채,‘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둥은 응접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우리는 다리를 꼬는 실례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곧은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15분에 걸쳐 마오쩌둥은 분명치 않은 어조로 이야기를 했으며,중년 여성이 그가 한 말을 또박또박 되풀이했다.그녀는 회담 도중에 몇 번인가 마오쩌둥이 말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말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커다랗게 한자로 적어 마오쩌둥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는 다시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실질적으로 내용이 있는 회담은 아니었다.중국은 싱가포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의전의 예를 갖추어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3년 전인)1972년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마오쩌둥과 만난 뒤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명석한 이지력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오쩌둥은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논리정연하게 생각을 피력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파킨슨씨병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82세로 접어든 마오쩌둥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쇠약해져 있었다.
다음 날 <인민일보>를 포함한 주요 신문들은 마오쩌둥의 왼편에 앉아 있는 나의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사진의 마오쩌둥은 내가 직접 봤을 때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 후 나는 몇 년간이나 보도진으로부터 마오쩌둥이 어떠한 사람이었냐고 질문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내가 만났던 것은 대장정을 이끌었고, 게릴라 부대를 막강한 전투부대로 키웠고,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할 때까지 게릴라 작전으로 싸웠고 국민당 군을 패배시키고, 마침내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을 세웠던 남자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1958년 그의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긴 했지만 그는 중국을 빈곤, 퇴폐, 질병 그리고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렇지만 그는 중국 인민을 무지와 저개발에서 해방시키지는 못했다.그렇다!. 마오쩌둥의 주장대로 1949년 10월 1일 “중국 인민은 일어났다”.하지만 아직 그들은 당당하게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그 날 오후에 나는 화궈펑과 인민대회당에서 두 시간에 걸쳐 두 번째 회담을 가졌다. 다음 날 오후는 “비공식적이 대담이나 휴식”이 될 예정이었다.
만리장성과 명나라 고분을 관광했다. 덥고 건조한데다가 먼지가 많은 날이었다.우리는 모두 목이 말랐다. 나는 명나라 고분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중국요리 풀코스를 시켜서는 다 먹어치웠다. 맥주도 잔뜩 들이켰다.적기(赤旗) 리무진으로 돌아오는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졸음이 왔다.
우리가 영빈관에 도착하자, 입구에 서 있던 의전관이 다가와 화궈펑이 나와 회담을 갖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왔다. 나는 그날 아침 그들로부터 오후에 회담이 있다는 전언을 받지 못했다.그런 말을 들었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고단한 관광은 보류했을 것이다.그날 일정표에는 회의 또는 관광이라고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더구나) 나를 만리장성과 명나라 고분에 데려간 것이 바로 그들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날 오후는 자유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만리장성을 오른 데다 점심때 마신 맥주에 90분 간 찜통 같은 차를 타고 먼지투성이 길로 다닌 탓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문득 그들의 수법이 상대의 진을 빼놓는 싱가포르 공산주의자들의 수법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2층에 올라가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중국차를 몇 잔 마시며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은 후 오후 4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두 시간이 걸린 회담에 참석했다.
덩샤오핑 부총리와의 만남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1978년 11월 파야 레바르 공항에서는 5척이 채 안 되는 땅딸막한 체구의 노인이 인민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보잉 727기의트랩을 내려오고 있었다.기운차게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의전 단을 사열한 후 나와 함께 차를 타고 (싱가포르)이스타나 관저의 영빈관으로 갔다.
그날 오후 우리는 각료회의 실에서 공식회담을 가졌다.(베이징의)인민대궁전에서 타구(唾具)가 놓여있는 것을 봤던 나는 덩 부총리 자리 옆에 사기로 만든 청백색 타구를 놓아두도록 지시했다.
나는 그가 평상시에 타구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또 이스타나 관저의 냉방장치가 되어있는 방에서는 금연을 해야 되는 규정이 있었지만 그를 위해 일부러 재떨이를 준비했다. 중국 역사상의 한 위대한 인물에 대한 예우의 표시였다.
나는 각료실의 환풍기도 켜 놓도록 지시했다.나는 그를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로서 환영하였다.그는 답사에서 싱가포르가 추억의 장소라고 말했다. 58년 전인 1920년, 그는 프랑스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서 이틀 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내가 1976년에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그는 축출되었기 때문에 나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4인방과의 싸움에서 패자가 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그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날 밤 그를 위해 베푼) 만찬석상에서 덩 부총리는 다정하고 사교적이었으나 긴장된 모습은 여전하였다. 그의 흉중에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그는 그에게 배트남이 메콩 강을 넘을 경우(태국까지 침범할 경우를 뜻함/방장 註) 중국이 취할 조치가 무엇인가 하고 다그쳐 물었더니 그는 베트남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되뇌었다.
수주전인 10월에 베트남 총리 팜 반 동이 싱가포르를 방문하였을 때 지금 덩샤오핑이 앉아있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소련과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통일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