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 법과 질서는 안정과 발전의 기본 틀을 마련해 준다.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은 나는 제대로 움직이는 사회를 위해서는 법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59년 총리가 된 나는 곧바로 살인사건을 제외한 모든 재판에서 배심원제도를 폐지시켰다.1969년 말레이지어로부터 독립한 후 나는 법무장관인 에디 바커에게 살인사건 재판에서도 배심원제도를 폐지하는 안건을 국회에 상정하도로 했다.
싱가포르의 가장 성공한 변호사인 데이비드 마샬(리콴유의 전임총리이자 정적/방장 註)은 자신이 맡은 살인사건의 99%가 무죄평결이었다고 주장했다.내가 그에게 변호를 맡았던 99%의 피고가 (과연)결백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임무는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배심원들은 (툭하면) 무죄방면을 선호했고, 가벼운 죄목에나 유죄판결을 내렸다.싱가포르의 일간 <스트레이트 타임스>의 한 법정 출입 기자는 살인사건의 배심원 중에 임신한 여자가 있으면 유죄판결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뱃속에 아이가 저주를 받을 거라는 미신 때문이었다.법률안의 의회를 통과하자 배심원제도는 없어졌고, 변덕스러운 배심원들 때문에 엉뚱한 판결이 나오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나는 범죄자는 사회의 희생물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944년과 1945년에는 형벌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당시 싱가포르는 日帝치하였다/방장 註) 먹을 걸 제대로 못 먹는 상황인데도 도둑이 없었고,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현관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었다.범죄발생을 없앤 요인은 명백했다. 영국군은 싱가포르에서 채찍이나 등나무로 만든 몽둥이를 가지고 태형(笞刑)을 가했었다.
전쟁 후 그들은 채찍 형을 폐지했지만 몽둥이로 때리는 벌을 그대로 유지했다.우리는 태형이 장기간의 교도소 복역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마약, 무기 밀매, 강간, 밀입국, 공공기물 파손과 같은 범죄에 이를 적용했다.
1993년 마이클 페이라는 열다섯 살 된 미국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도로 표지판을 파손하고 스무 대가 넘는 차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는 법정에 서게 되자 유죄를 인정했고 그의 변호사는 선처를 요구했다. 판사는 태형 여섯 대와 4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미국인 소년이 잔인한 아이사인들에게 곤장을 맞게 되리라는 사실은 미국 언론을 격분시켰다.그들이 얼마나 여론을 격분시켰는지 클린턴 대통령이 몸소 나서 (싱가포르의)옹 텡총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다. 싱가포르는 아주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만약 우리가 이 소년이 미국인이기 때문에 태형을 면해 준다면 어떻게 우리 국민을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
각료회의가 끝난 후 (고촉동)총리는 옹 대통령에게 태형을 네 대로 감해 줄 것을 충고했다. 그래도 미국 언론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들이 공공기물 파손에 대한 싱가포르의 형벌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마이클 페이 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된 직후 나의 딸 링이 뉴햄프셔에서 운전을 하다 경찰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링의 차가 속도위반을 하자 경찰차는 파란 헤드라이트를 깜박이며 정지명령을 내렸는데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었다.경찰 유치장에 링을 데려간 경찰관은 나의 딸의 국적을 물었다.
링은 경찰관의 말에 대답 후 마이클 페이 사건 때문에 싱가포를 싫어하느냐고 물었다.경찰관은 페이가 벌을 받을 만했다고 말하고 링을 다시 차로 데려다 준 후 행운을 빌어 주었다.
페이는 네 대의 태형을 받은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몇 달 후 미국언론은 그가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한 뒤 아버지에게 마구 덤벼들어 구타한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한 달 후 그는 부탄가스를 마시다 친구가 켠 성냥불에 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중화상을 입었다. 그는 자신이 싱가포르에 있을 때부터 부탄가스 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이러한 조치가 싱가포르의 법과 질서를 가능케 한 것이다.
1997년 세례경제포럼의 국제경쟁력 보고서에, 싱가포르는 “조직범죄가 사업에 심각한 손해를 끼치지 않는 나라” 중 1위에 올랐다. 같은 해 국제경영개발연구소가 편찬한 세계경쟁력 연감에 싱가포르는 치안 부문 1위에 올랐다. 그 보고서는 싱가포르를 “국민들이 자신과 자신의 재산이 보호되고 있다는 완벽한 신뢰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 소개한바 있다.
(이 글을 옮기기 하루 전날 밤,나의 이웃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아내가 귀엣말을 해 준다.이웃집 부인이 자신의 벤즈 승용차를 주창장이 없어 항상 대문 밖 노상에 주차 해 놓았기 때문인 듯싶다. 부인은 어디 먼 곳에 갔고, 사색이 된 남자 주인은 무서워 집에도 못 들어간 채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더라는 것.
나의 집에도 도둑이 든 적이 있다.대문밖에는 ‘퀵 서비스’가 놓고 간 배달 물이 놓여있었다.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자물쇠는 크게 부서져 있고, 방안은 세간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서너 시간 지나서야 귀찮다는 듯이 덜렁덜렁 찾아 온 경찰에게 배달 물까지 내보이며 자초지종을 신고했으나 뭔가 끄적대는 시늉만 하더니 5~6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지금 우리는 이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노무 정부한테 굳이 1등 국가를 실현해보라고 권할 생각은 없다.무엇이 1등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1등으로 사는 지를 도통 알아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딱 두 가지...민생과 치안만 제발 완벽하게 갖춰달라고 말하고 싶다.치안? 싱가포르처럼 가혹하게 처벌하면 된다. 민생? 증시(證市)를 부양시키면 된다.
우리나라 가구 세 가구당 한 가구가, 미국은 두 가구당 한 가구가 증시에 손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증시가 활성화되면 정권은 박수를 받게 마련이다. 세계 모든 선진국들의 공통 현상이다. 이 명명백백하고 자명한 사실을 도대체 왜 모른단 말인가?/방장 註)
리콴유가 만난 큰 나라 거물들
이웃 나라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문제는 (다 지난 일이 됐지만) 그의 자녀들이 모든 이권이 따르는 계약과 독점사업에 관여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아들 토미가 경영하는 국영자동차 독점기업과 딸인 투투두가 가진 발전소 그리고 다른 아들들이 은행을 다투어 소유한데서 IMF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1998년 3월 (당시) 미 부통령 월터 먼데일이 클린턴의 메시지를 수하르토에게 전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왔다.미국으로 돌아가는 중 싱가포르에 들른 먼데일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마르코스 대통령과 잘 알고 지냈습니다. 당신은 그를 영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악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수하르토와 마르코스는 어떻게 비교될 수 있습니까? 수하르토는 애국자입니까, 악한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르코스는 영웅으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악한으로 끝났습니다.수하르토는 다릅니다. 수하르토 영웅들은 조지 워싱턴이나 제퍼슨,메디슨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바 중부에 사는 (이슬람) 술탄들입니다.수하르토의 부인은 그곳 왕가의 공주입니다.인도네시아의 대통령으로서 그는 거대한 국가의 대 술탄이었습니다.수하르토는 그의 자녀들이 술탄의 왕자와 공주처럼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에게 특권을 주는 것은 술탄의 당연한 권리였으므로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는 자신을 애국자로 보고 있습니다.나는 그를 악한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수하르토는 군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여겼다.슬프게도 그는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당시 인도네시아의 한 장군이 말하길(이 말은 미국대사가 IMF가 터진 그 해 3월 나에게 전해 준 말이었다) “만약 1천명의 학생들이 일어선다면 군은 몽둥이로 그들을 진압할 것이다.만 명의 학생이 일어나도 군은 그들을 통제하려 할 것이다.그러나 10만 명이 일어나면 군은 학생들의 편에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