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 전통적으로 끝까지 투쟁하는 경향이 있는, (예컨대)한국과 같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민주주의가 이식될 때,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은 그 나라의 집권자가 군사 독재자이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든 관계없이 거리에 나와 싸웠(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자신의 풍습과 문화에 걸 맞는 형식의 대의(代議) 정부를 발전시킬 것이다.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과 서양 그리고 심지어 일본의 관심은 타이완, 한국,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아니라 바로 중국에 대한 우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그리고 인권과 관련, 일본의 경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시의 잔혹 행위에 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태도였다. 서구는 일본의 경제력을 인정하고 1975년 랑부이에 회의부터 G7정상회의에 일본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일본 지도자들은 독일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애매하고 불분명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1989년 총리에 임명된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총리가 다음 해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과거의 총리들과 구별되는 자세를 취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준 과거 일본인의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회한을 표한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을 결의 한다”라고 말했다.이는 거의 사과에 가까웠다.
나는 가이후 총리에게 (내가 목격한)전시의 기억에 대한 일본과 독일의 태도 차이를 역설했다.독일 기업가들과 금융가들이 그들의 이력서를 나에게 줄때,전시의 경험을 반드시 기록했다. 스탈린그라드나 벨기에 전투에 참가했고,소련이나 미국, 또는 영국에 의해 전쟁포로로 잡힌 장소,그들이 도달한 지위와 획득한 훈장까지 소상하게 적었다.
그러나 일본 기업가들의 이력서에는 (거개가)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겨 있다. 자신에 대한 상대의 의심과 불신에 장막을 치고 싶은 것이다.나는 일본인들이 다음 세대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교육시켜온 독일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가이후 총리에게 제안했다.그가 1945년 당시 아직 어린 학생으로, 군사적 배경을 갖지 않은,전후의 첫 번째 총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미야자와 기이치(궁澤喜一)총리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그 일을 충분히 완수할 만큼 오래 재임하지 않았다.미야자와는 땅딸막한 체구의 유쾌한 남자였다.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할 때면 둥근 얼굴에 미심쩍은 표정을 떠올리며 넓은 눈썹을 일그러트리곤 했다.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용의주도한 자세를 취할 때 그는 입술을 오므렸다.나에게 그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처럼 보였다. 그가 학계에 투신할 생각이 있었다면 자신이 졸업한 도쿄대학에서 수월하게 교수 자리를 얻을 수도 있었다.
1991년 언론은 내가 했던 “캄보디아에서의 UN평화유지군이 작전에서 일본을 재무장시키는 것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알코올이 든 초콜릿을 주는 것과 같다”는 말을 인용했다.총리가 되기 직전 자민당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한 오찬석상에서 미야자와는 내 말이 뜻하는 의미를 물었다.나는 일본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힘들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당시 일본 자위대가 캄보디아의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참전했음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방장 註).
일본인들은 완벽을 추구하고, 꽃꽂이를 하든 칼을 만들든 전쟁을 하든 간에 끝까지 가고 보는 뿌리 깊은 습관을 갖고 있다.미야자와는 가이후의 “회한”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았냐고 내게 물었다.그 말은 좋은 시작이지만 결코 사과는 아니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실제로 칭찬할 만한 기질을 갖고 있다.내가 1970년대 후반 시고쿠의 한 도시인 다카마스를 방문했을 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일에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해준 일이 있다.
일본 대사가 대접한 만찬에는 별 세 개짜리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훌륭한 요리가 나왔다.과일과 디저트를 들 때 얼룩 하나 없는 조리복을 입은 30대 요리사가 잘 드는 칼로 감과 배의 껍질을 깎아 주었다. 그것은 마치 대가(大家)의 공연과도 같았다. 나는 그의 훈련과정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접시를 닦고, 감자를 깎고, 야채를 자르는 주방 보조로 시작해서 5년이 지난 후에야 보조 요리사가 되었다고 했다. 10년 후 그 호텔의 주방장이 된 그는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요리사이건, 웨이터건, 객실 담장자이건,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주어진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열망은 고도의 생산성을 창설하고 거의 무결점에 가까운 제품을 만들어 냈다.
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일본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중국, 한국, 베트남이나 동남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일본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그들은 개인 개인이 레고(Lego)벽돌처럼 딱딱 맞춰지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바둑이나 장기처럼 일대 일로 겨루는 게임이라면 중국인들은 일본인을 이길 수 있다.그러나 단체로, 특히 한 공장의 생산 팀을 짜서 겨룬다면 이기기 힘들다.
(그렇다면) 싱가포르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싱가포르는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적 책임을 우선하는 유교주의 사회였다.나의 책임 중 가장 우선순위는 국민들의 복지였다.나는 공산주의 파괴분자들을 상대해야만 했는데 이들을 공개법정에서 기소하기 위해 필요한 증인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1991년 5월 도쿄에서 열린 한 포럼에 나를 초청해서 유명한 일본과 미국의 석학들과 함께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선 영국과 프랑스가 40여 개의 전 영국 식민지와 25개의 전 프랑스 식민지에서 서구식 헌법체제의 독립을 부여한지 50여년이 흘렀지만 그 결과가 미미했으며, 미국조차도 50년간의 강점 후에 필리핀을 1945년 독립시켰지만 민주주의를 싹을 틔우는 데는 마찬가지로 실패했다고 말했다.
나는 한 민족이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도입하기 전에 우선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발전에 도달해야 하며, 다수의 중산층을 형성해서 그 구성원들이 더 이상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투쟁하지 않아도 되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그러므로 미국과 유럽에서 20세기 말에 형성된 인권에 대한 기준이 전 세계에 모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싱가포르 같은) 유교 사회에서 개인은 가족, 확장된 가족, 동료, 또 좀 더 광범위한 사회의 맥락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정부는 가족의 역할을 맡거나 맡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
많은 서구인들은 미혼모의 경우처럼 가족이 붕괴되었을 때 정부가 가족의 책임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동 아시아인들은 이러한 접근법을 피한다. 싱가포르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동시에,근면, 절약, 효도 그리고 배움을 중시하는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의 힘과 영향력에 의존하고 있다.자유는 질서 속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내가 되도록 언급을 피하고 싶은 “아시아적 가치”는 바로 이런 유교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도덕의식이 필요하다.악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악을 저지른 인간은 사회의 희생양일 뿐이지 인간 자체가 악은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중국적인 가치에 경도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규율이 잡혀있었고, 예의 바르고 윗사람을 공경했다. 그 결과는 좀 더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낸다.그런 가치들이 영어교육으로 인해 희석되었을 때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활기 없고 격식이 덜 갖추어진 행동을 했다.게다가 영어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대게 자신감이 부족했다.자신의 모국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과교수인 새뮤얼 헌팅턴(`문명의 충돌` 저자/방장 註)은 1995년 8월 타이페이에서 행한 연설에서 싱가포르의 모델을 타이완의 민주주의 모델과 대조했다.그는 “깨끗하고 비열한” 싱가포르와 “더럽고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