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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도 긷고 빨래도 하던 마을 샘터와 우물
요즈음에는 시골마을도 맑고 위생적인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도시못지 않게 급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통합적인 급수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더라도 집집마다 성능 좋은 우물파는 기계를 불러 관정을 뚫고 전기 모터를 설치하여 오염되지 않은 지하수를 끌어 올려 쓰기 때문에 굳이 샘터나 공동우물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급수시설과는 거리가 멀었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 시골 마을은 샘터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세수를 하였다. 물론 집 가까이에 도랑이나 개천이 있으면 일어나자 마자 몰려나가 가는 모래로 이를 닦고 세수를 한뒤 바케츠에 쇠죽 끓일 물을 퍼다 쓰곤 하였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보릿고개 시절에도 부잣집은 인부를 사서 집안에 우물을 파서 두레박으로 퍼올려 사용하거나 우물에 파이프를 박은 수동식 작두 펌프를 설치하여 물을 퍼올렸다. 작두 펌프는 작두를 누를때 내려갔던 피스톤이 올라오면서 물통 하단 내부에 들어있는 바킹이 닫히는 과정에서 올라온 물이 배출구를 통해 쏟아지는 형태다.
작두질을 많이 하여 피스톤과 열렸다 닫혔다 하는 두개의 중간 바킹이 낡아 물이 빠져버리면 바가지로 물을 채우고 작두질을 해야 몇자례 "부~북,부북"소리를 낸후 물이 올라온다. 작두펌프도 미제는 국산보다 크고 무겁고 튼튼한데다 뿜어 올리는 물의 양도 많아 가세가 넉넉한 부잣집은 미제 작두 펌프를 사다 쓰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에 우물을 파거나 작두 펌프를 설치할 처지가 못되는 대부분의 농가는 마을이 생길때 부터 대대로 사용하는 공동 샘터나 우물물을 길어다 썼다.
마을옆이나 가운데로 도랑이나 개천이 흐르면 그곳에 공동 빨랫터가 따로 있었지만 도랑이나 개천이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은 샘터나 우물옆에 빨랫터를 만들어 빨래도 함께 하였다. 대개 샘터는 지속적으로 물이 솟아나기 때문에 물이 물골을 타고 넘쳐 흘러 나온다. 흘러 나온물은 사각형 시멘트 구조물을 만들어 가두어 두고 그앞에 양쪽으로 넓직한 돌들을 두세사람씩이 동시에 빨래를 할 수 있도록 길게 늘여놓아 빨랫터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면 마을 아낙네들이 양잿물에 삶은 빨래를 들고나와 빨랫돌에 문지르고 방망이로 두드려 패는 식으로 빨래를 한다. 물이 넘치는 샘터와 달리 두레박으로 퍼쓰는 공동 우물은 물이 어느정도 차면 수위가 그래로 있기 때문에 빨랫터를 만들기가 곤란하지만 우물가 옆을 돌로 평평하게 만들어 두레박 물이지만 퍼올려 어느정도 빨래를 할수있게 만들어 놓는다.
또개미 위에 물동이 이고 물긷던 시골 샘터
샘터나 공동우물 주변은 잎이 콕콕 지르는 재래종 향나무가 거의 심어져 있다. 구불구불한게 꽤멋있는 향나무들도 많다 왜 샘터나 우물가에 향나무를 심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제사나 묘사 지낼때 향로에 불을 담아 마른 향나무를 칼로 삐져 향을 피웠기 때문에 우물가 향나무는 제사용 향불용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그리고 우물가에 빠지지 않는것은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기와나 함석을 얹은 지붕이나 덮개를 설치하고 물담은 물동이를 머리에 올리기 쉽게 가슴높이로 물동이를 놓을 수 있는 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샘터나 우물에서 물을 길어가는 것은 여자들이 몫이었다. 간혹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애처가가 물지게를 가름대를 설치하여 물동이로 만든 설탕꿀통에 물을 길어가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거의 아낙네와 처녀들이 물동이로 이어 날랐다. 아낙네들이 물을 길어 올때는 또개미라고 불렀던 또아리를 머리에 얹고 그위에 바가지를 담은 물동이를 이고온다.
또개미는 화문석이나 돗자리를 짜는 왕골로 주로 만들었다. 왕골이 질긴데다 속이 솜이 들어있는것처럼 푹신푹신하기 때문이다. 상단에는 조그만 구멍을 내 둥그런 빵모자처럼 만드는데 한쪽에 입에 물수 있도록 삼(대마)을 꼬아 만든 끈을 단다. 물이 물동이에 차면 이고갈때 출렁이지 않도록 바가지를 거꾸로 엎은 다음 또개미를 머리에 얹어 끈을 입에 물고 양손으로 물동이 손잡이를 아래에서 위로 받쳐 올려 머리에 인다.
물동이를 깨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물동이를 많이 이어보지 못한 처녀나 새댁이 발을 헛디디거나 돌뿌리에 걸릴경우, 겨울 빙판길에 미끄러 질라치면 어김없이 물동이는 '파싹'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난다. 가난한 살림에 물동이도 살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던 때라 물동이를 깬 새댁과 처녀들은 집에 가지도 못하고 주저않아 콧물 눈물 뿌리는 쓰라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라져 버린 마을 아낙네들의 해방구,소통의 공간 샘터
샘터나 공동 우물가는 집에서 먹는 식수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마을 아녀자들의 해방구이자 소통의 공간이기도 했다. 엄한 시부모와 애정표현과는 거리가 먼 통나무 같은 서방에 눌려 지내다 우물가에 나오면 같은 처지의 아낙네들을 만나 하소연도 하고 옆집소식,마을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빨랫감을 갖고 나오면 빨래하는 동안은 그야말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운다. 요즘에야 컴퓨터와 핸드폰이 있다보니 직접 만나지 않고도 마치 만난것처럼 괴성을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등 야단법석을 떠는 아낙네,아가씨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전화등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전무한데다 엄한 가정,사회 분위기탓에 봉쇄되어있던 시절인지라 소통본능이 만나면 봇물 터지듯하고 셋이 만나면 부엌 살광에 엎어놓은 사발이 난리 부르스를 춘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폭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을 아낙네들이 울고 웃고 서로 아픔을 나누던 소통의 공간이자 해방구요,뜨거운 여름날 목을 축여주고 등목을 치며 더위를 달랬던 마을 샘터,마을 우물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거나 남아 있어도 잡초 우거진 속에 깨져 떨어져 나간 덮개에 덮여져 형체를 알아볼수가 없다.어느 시절에나 그옛날 누님들이 바가지에 퍼주던 시원하고 달콤한 우물맛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