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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과 화전놀이 밖에 몰랐던 보릿고개 시골
1960~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시골 농촌마을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쓰던 시절 이었던데다 먹고살기도 바쁜 가난 때문에 텔레비전을 본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시골이라해도 읍내는 연극공연도 하고 극장이 있어 영화관람은 물론 남진,나훈아,이미자,하춘화등 유명가수와 세상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배꼽잡게 만들던 서영춘,구봉서,장소팔등 코메디언,만담가들로 구성된 극장쇼 공연과 서커스단 묘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날 걸어서 겨우 장보러 다녀오는 시골동네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그림의 떡이었다. 따라서 시골마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이란 고작 마을마다 보유하고 있던 징,북,장구,꽹과리,벅구(소구)등 전통 풍물놀이 악기를 가지고 추석,설,정월 대보름,명절이나 환갑잔칫날 농악놀이와 봄철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마을축제였던 화전놀이가 전부였다.
이처럼 당시 시골 농촌마을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구조적으로 누릴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이와같이 문화생활의 불모지요 오지나 다름없었던 당시 시골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생생한 라이브 공연이 일년에 두세차례씩 벌어진 것이다. 다름아닌 떠돌이 약장수들의 순회공연이었다. 당시 치마저고리,핫바지 차림에 산토끼와 발맞추며 농사만 짓던 세상물정에 캄캄한 순박한 시골사람들에게 현대적인 약장수들의 공연은 굉장한 눈요깃 거리였음은 물론 대단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울리고 웃기고 배꼽잡게 만든 약장수 공연단
약장수들은 대개 한두명의 여가수와 약 선전겸 사회를 보는 진행자,깽깽이라 부르던 바이올린,손풍금으로 부르던 아코디온,기타,드럼,색소폰을 키고 치고 두드리고 부는 악사로 구성되어 있었고 규모가 큰 패거리는 입에 휘발유를 머금어 불붙여 뿌려대고 배위에 돌을 놓고 해머로 두드리거나 작두날 쇼를 하는 차력사도 있었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것은 목에 줄을 맨 원숭이 한마리와 이동수단인 스리쿼터였다.
당시 시골마을은 약장수들이 순회공연을 하며 약을 팔만큼 관객이 적지 않았다. 큰마을은 100여호가 넘었고 300여호가 되는 마을도 없지 않았다. 보통 시골마을 규모가 50여호 정도는 되었는데 집집마다 부부를 포함 노인까지 합치면 성인들이 4~5명 되는 집이 많았고 주렁주렁 달린 아이들에다 동네 머슴들까지 합치면 마을 인구가 300여명을 상회하였다.
따라서 약장수가 공연을 하면 사회자가 "아이들은 저리 가거라"하고 내쫒아도 100여명 이상씩은 되었으니 공연하는데 관객이 부족하여 못하거나 가수가 신명이 나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를 낼 정도는 아니었다. 약장수들은 가을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 스리쿼터를 타고 주기적으로 시골마을을 찾았다. 당시는 시골에 현금이 별로 없어 추수한 쌀,콩 등 곡식을 약값으로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약장수들은 마을에 도착하면 잠을 잘 수 있는 사랑채를 구한다음 회관앞이나 마을 공터에 공연준비를 하였다. 밧데리를 사용한 앰프로 구성진 트로트를 틀면 약장수가 왔다는것을 알고 저녁 밥숟가락 놓기 무섭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우르르 몰려 나온다. 무대라고 해야 맨땅에 덕석(멍석)을 깐 정도였지만 시골 관객들은 나비 넥타이를 맨 말쑥한 양복차림에 깽깽이를 키는 대중화된 바이올리니스트,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왼손을 벌였다 좁혔다 하며 손풍금을 치는 악사,현대식 파마머리에 곱게 양장차림으로 애간장을 녹여내는 목소리로 당시 유행하던 '동백 아가씨' '비내리는 호남선'을 불러대는 여가수의 노래에 넋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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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돌을 깔고 앉거나 아니면 맨땅에 그대로 주저앉아 턱을 손으로 괴고 몽롱한 눈으로 쳐다보다 사회자가 만담을 하면 금세 깔깔댄다. 막간을 이용하여 사각형 곽으로 든 약을 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약선전을 하는것도 싫지가 않았다. 약곽에는 거의 인삼 그림이 들어있는게 대부분이었는데 만병통치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주로약은 염소똥만한 크기의 환으로 된것으로 식사후 한번 먹을때 20~30알 정도 먹으면 속이 안좋은 위장병 정도는 한마디로 직빵이라는 말에 구경값도 할겸 약들을 산다.
약이 제법 팔리면 사회자는 옆에 매달아 놓은 원숭이 머리를 막대기로 두세번 통통치며 "야 이놈아 마을 양반들이 너를 보러 나오셨는데 재주좀 부려봐라"하면서 또다시 뒤통수를 통통치면 원숭이는 재주대신 낯빤대기가 빨개지도록 핏대를 올리며 홀딱 홀딱 뛰면서 캑캑거린다. 말로만 듣던 원숭이를 처음 본데다 성질 부리는 원숭이라 우스워 마을 사람들은 배꼽을 잡는다.
이어지는 공연에 나선 가수와 악사들도 신이 난다. 약이 잘 안팔려도 중간에 공연을 그만두는 일없이 공연에 최선을 다한다. 공연은 하루에 끝내기도 하지만 공연을 가지않은 옆동네 사람들까지 구경을 오기때문에 이틀밤 가량하는게 대부분이다.
현대문화의 오아시스 약장수 공연이 그리워진다.
공연을 끝내고 약장수 공연단이 유숙하는 사랑채나 마을회관은 멋진 여가수와 원숭이를 보기위해 처녀,총각,아이들이 몰려가 기웃거리는등 북새통이 되곤했다. 약장수 공연단의 말쑥한 옷차림과 멋진 여가수,멋드러진 악기연주를 동경한 나머지 가끔 쌀 너댓되를 훔쳐 광목 보자기에 싸들고 도회지로 줄행랑을 친 처녀,총각들 때문에 속상한 시골부모들이 없지 않았다.
또 만병통치약 이라는 말에 사긴 하였으나 막상 먹어보니 효험이 없어 속았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농삿일과 보릿고개 팍팍한 삶으로 찌들고 고통스런 마음을 심금을 울리는 노래와 만담,원숭이 재주로 달래 주었던 약장수 공연단이 그립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통 농악놀이 밖에 몰랐던 보릿고개 시절 현대적 문화생활의 오아시스였던 약장수 공연 다시한번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