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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1960~70년대 시골농촌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농사짓는데 사용하는 거름으로 귀하고 값비싼 화학비료보다는 풀과 볏짚,보리짚을 썩혀 만든 퇴비와 인분과 나뭇재,왕겨,가축분뇨등으로 섞어 만든 두엄,그리고 액체상태의 인분과 오줌이 주로 사용되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일본,영국,프랑스등 선진국들은 기계화된 과학영농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우리나라는 큰마을에 한대정도 발로 밟는 반자동 탈곡기와 손으로 미는 제초기 외에 거의 대부분 인력에 의한 전통적인 재래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소를 이용한 쟁기질로 논밭을 갈고 사람의 손으로 모를 심었으며 호미로 초벌,두벌,세벌 김매기를 하였다.
벼에 도열병이나 문고병등 바이러스병이 생기거나 이화명충등이 번지면 하얀 분말가루 농약을 담은 삼베 주머니를 나무 막대기 끝에 매달아 툭툭 치고 다니거나 등에 짊어지고 왼손으로 펌프질하는 압력에 의해 분사되는 수동 분무기로 농약을 쳤다. 가을에 벼가 익으면 낫으로 베어 볏단으로 묶어 맞붙여 세우거나 논바닥에 깔아 말렸다.
두세번 뒤집어 골고루 햇볕과 바람을 쐬인후 잘 말랐다고 판단되면 앞부분에 대나무를 엑스자로 묶어세운 지게에 볏단을 10~12단씩 짊어져 날라 마당에 둥그런 볏가리를 쌓아놓았다가 적당한 날을 잡아 품앗이나 품삯을 주어 얻은 마을 아주머니 놉들을 불러 각기 가져온 홀태를 마당에 삥 둘러 설치해놓고 나락을 훓었다.
나락을 훓으면서 누구집 나락이 잘되었고 누구집 나락은 거름을 하지 않아 모가지가 얼마 안되고 나락도 붙은게 형편없다느니 목도열병을 못잡아 그런건지 쭉정이만 훑어 속이 상했다는 말들이 아니 나올수 없다. 병들어 농사를 망친것도 속상하지만 거름을 제대로 하지 않아 나락 모가지가 형편없다는 말을 들으면 농사에 게을렀다는것을 뜻하기에 주인은 고개를 들기 어렵다.
농사를 잘지으려면 땅이 비옥해야 하고 기름진 땅은 거름때문
이처럼 농사를 잘 지으려면 씨뿌려 김매고 농약쳐서 작물이 잘 자라도록 하는것도 빼놓을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거름을 충분히 주어 땅심 즉 작물이 영양분을 흠뻑 섭취할 수 있도록 땅을 비옥하게 해주는 것이다. 땅을 기름지게 하려면 땅을 산성화시키는 화학비료를 멀리하고 푹 썩힌 퇴비를 거름으로 주는게 최고였다.
거름이나두엄,퇴비,비료 모두 비슷한 의미지만 비료는 대개 화학비료를 뜻하고 지역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름하면 사람의 인분을 포함 풀등 자연 친화적 유기질로 만든것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다.유기질 거름을 만드는 방법은 보통 두가지 형태다.측간에서 가족들이 누어놓은 인분을 나뭇재와 왕겨를 섞어 만들거나 소마굿간이나 돼지우리에 깔아준 짚과 풀이 소,돼지 똥오줌과 충분히 섞여 질퍽해질때쯤 쳐내 만든 두엄,그리고 풀과 볏짚,보리짚을 썩혀 만든 퇴비다.이 두가지 가운데 거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건 퇴비다.
두엄은 가족이 적거나 소,돼지를 기르지 않으면 양이 적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두엄은 감자,고구마,고추,배추,뽕밭등 주로 밭농사용 거름이라는 인식이 자리잡혀 있다.따라서 면적이 넓은 논농사용 거름은 퇴비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웠다.그러다보니 시골에서는 봄이되면 지게를 지고 들과 산으로 나가 새로 자라난 풀과 칡덩굴,도토리나무등 활엽수 새순을 잔뜩 베어 말려 놓았다가 보리타작이 끝난 논에 깔아 쟁기질로 갈아 엎는다.
쟁기질을 한후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하기전에 괭이로 고르면서 풀을 밟아넣는 봅썰미(지리산 주변 남원지역 토속어)를 한다.이렇게 1차 모내기전 말린풀로 퇴비를 한후 모내기가 끝나면 남자들은 대부분 퇴비증산에 나선다.요즈음에는 벼만 심는 1모작으로 끝내지만 보릿고개가 기승을 부렸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벼를 베고나면 보리를 심는 2모작을 하였다.모내기후 만든 퇴비를 벼를 베어낸후 보리를 갈기전 논에 뿌리기 위한 거름을 만들기 위해서다.
낫질과 풀지게,작두질이 만들어낸 퇴비거름
수확을 많이 거두기 위해서는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퇴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달렸다며 '퇴비증산왕'시상제도까지 만들어 퇴비증산왕을 뽑아 대대적인 시상식을 개최하는등 행정기관까지 나서서 퇴비증산을 독려하였다.이처럼 농사 성패가 거름에 달렸다고 여겼던때라 농부들은 다른 사람보다 풀을 한주먹이라도 더 베기위해 꼭두새벽부터 삼발이 나무받침대 위에 얹은 숫돌을 우물가나 물이담긴 확독옆에 놓고 물을 쳐가며 낫을 갈았다.
당시 주로 사용하던 낫은 두가지 종류였다.대장간에서 만든 손잡이가 작고 무거운 전통 우리낫인 조선낫과 손잡이가 길고 가벼운 왜낫이었다. 조선낫은 날을 세우려면 쇠가 두꺼운 양날을 번갈아 오래 갈아야 하지만 날이 쉬 무디어 지지 않고 나무가지도 자를 수 있는 잇점이 있지만 손잡이가 짧고 무거워 멀리 날렵하게 풀을 베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왜낫은 안쪽날만 갈면 되는데다 얇아 날이 빨리서고 날렵하게 멀리있는 풀을 연속으로 쳐 끌어내는 식으로 벨때 효과적이다.그런반면 왜낫은 날이 약해 나무가지나 단단한 물체에 부딪치면 이빨빠지듯 날이 잘 빠지고 쉬 무디어져 자주 갈아야 하는 단점이 있다.
나이든 농부들은 조선낫을 젊은이들은 왜낫을 주로 풀을 베는데 사용하였다. 썬득썬득하게 잘 갈려진 낫은 날이 보이지 않지만 잘 갈리지 않으면 날면이 희게 보여 낫이 잘 갈렸는지 덜 갈렸는지 알수있다. 두세자루 낫을 갈고나면 논 물꼬를 보고 돌아와 새벽밥을 먹고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시원할때 베어야 한다며 아침 여섯시쯤 지게를 지고 아침이슬을 헤치며 들과 산으로 풀을 베러 나간다.
리어카나 소달구지가 있으면 산판길을 따라 깊은 산속까지 풀을 베러 가기도 하였다. 오전10시쯤 되어 한짐 가득히 벤풀을 퇴비장으로 마련해놓은 집옆 공터에 부려놓고 다시 낫을 갈아 놓은후 논물꼬를 다시 한번 살펴본 다음 시렁에 걸어놓은 대나무 바구니에서 식은 보리밥을 꺼내 텃밭에서 솎아온 상추와 풋고추로 아내가 점심을 차려주면 느긋하게 먹고 바람이 잘통하는 툇마루에 목침을 베고 낮잠을 즐기거나 정자나무 그늘에서 쉬었다가 햇볕이 조금 누그러지면 다시 지게를 지고 풀을 베러간다.
풀꾼들의 콧노래,거름냄새가 그립다.
이렇게 4~5일 베다 모은풀은 풀을 벨수없는 궂은날을 이용하여 작두로 5~10센티길이로 썬다.작두는 폭10센터,길이 70cm내외의 사각형 무쇠날로 되어있고 앞부분에는 쇠고챙이로 고정할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으며 뒷쪽은 발디딤용 통나무에 잘 박히도록 뾰족하게 되어있다. 작두판은 Y자형으로 가지가 뻗은 소나무와 참나무등을 베어다 만들며 앞쪽에 고정핀 두개를 박아 작두날을 고정시킨다.
작두질은 까딱 잘못하면 손가락이 잘릴 수 있기 때문에 작두에 풀을 지르고 멕이는 사람은 아버지나 남편이 맡고 부인이나 젊은 사람이 작두를 밟는다. 작두질은 풀을 지르는 사람이 위험한 반면 힘든건 작두를 밟는 사람이다. 왼손에 작대기를 짚고 오른손에는 발디딤판 옆고리에 연결된 손잡이줄을 잡고 작두날 높이에 맞추어 만든 받침대에 왼발을 딛고 올라 오른손으로 작두를 들어 올린후 풀이 날아래로 질러지면 오른발로 힘껏 밟는다.
작두로 풀을 자르는것은 퇴비가 발효가 잘 되도록 보통 보름 단위로 풀을 뒤집어 섞어 쌓을때 편리한점,그리고 거름이 다되어 논에 뿌릴때 골고루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작두질이 끝나면 다시 며칠 베어 모은 풀을 다시 썰어 앞서 썰어 쌓아놓은 발효된 풀과 섞어 거름삽을 이용 둥그렇게 다시 쌓는다. 이렇게 뒤집기를 반복하며 여름을 지나는 동안 김을 피워 올리며 푹푹찌는 과정을 거쳐 굼벵이가 굼실댈 정도가 되면 훌륭한 거름으로 탈바꿈한다.
패스트 푸트나 다름없는 화학비료가 고유의 식물의 먹거리였던 퇴비로 만든 거름을 대체하면서 풀베는 농부,작두질이 사라진 요즈음 그옛날 밀짚모자에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