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에서 국통맥을 보자면, 바다가 되기 1만년이전의 서해지역의 마고를 계승한 황궁씨의 후손 환인씨의 환(한)국과 한(환)국을 계승한 한웅씨의 신시배달(밝땅)국,그리고 신시배달국을 계승한 한검씨의 단군(땅임금)한국조선과 단군한국조선을 계승한 고씨(해모수)의 부여, 부여를 계승한 고씨(고추모)의 고고리(고구려),그리고 고고리를 계승한 대조영의 대진국과 고리(고려), 고리를 계승한 조선과 대한민국으로 1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통맥이라 할 수 있다.
마고의 직계 후예들이 마고조선(한반도)인들이고, 고대 한반도인들의 일부가 북만주로 이주하여 수렵어로생활을 했던 몽골(말갈)족이고, 몽골(말갈)족의 일부가 베링해협을 건너서 수렵농경생활이나 아마존 정글지역에서 수렵어로 생활을 하고, 남미 산악지역에서 농경생활을 해 오다가 근세에 아메리카를 발견한 유럽의 백인종들에게 멸종당한 아메리카 한민족 인디언들이다.그리고, 마고족이 서해지역에서 요하지역의 천산지역에서 몽골.시베리아지역으로 이주하여 유목수렵생활을 하다가 기후변화로 다시 요서지역의 마고족(곰족.호족)과 융합한 구리(코리=고리)족이 바로 맥족으로 마고이후 중동지역과 유럽.아프리카까지 이주하여 문명을 전파한 한국.배달국.단군한국조선.부여.고구려 등 한민족사를 주도한 기마족이다. 이들 기마족이 단군조선붕괴이후 한반도지역으로 유입되니 북부지역의 최씨 낙랑국.옥저.예맥이며, 기마족의 유입으로 북부지역에서 남부지역으로 이주한 마조선 지배세력이 영산강지역을 마지막 근거지로 고구려.백제.신라.가야4국시대이전까지 한반도남부지역의 진.번한의 3한의 주인노릇을 하니 한반도3한인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 시대
대한민국 국민이 한민족사에서 당당함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고리(고구려)를 개국한 고추모. [삼국사기]는 그를 동명성왕이라 칭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껏 우리는 사극이나 소설을 통해 고추모와 동명왕을 동일인으로 생각해왔다. 고추모의 아들 온조는 이복형 비류의 나라 '어하라'를 떠나 마한(한반도)땅으로 들어와 마한의 허락을 받아 경기도지역을 영역으로 한강변에 훗날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의 나라 백제에게 통합된 '십제'를 개국하고 아버지 고추모를 시조신으로 제사를 지내니 동명왕이다. 또한 고구려도 당대의 광개토대왕비문을 보면 고구려 개국시조 고추모을 추모성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추모는 과연 동명왕일까?
[위략]과 [후한서]를 비롯한 지나국 고대 역사서에는 모두 동명왕을 북이'탁리국'에서 탈출하여 부여를 개국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개국시조 고추모와 부여의 개국시조 동명왕은 별개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배경으로 고추모는 부여의 개국시조 동명왕으로 불리게 됐을까?
부여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
"고구려 유리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침범하다가.."[삼국사기 유리명왕 14년]
"고구려가 마한, 예맥과 연합하여 현토성을 공격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2만 병사를 주어 현토성을 구원.."[삼국사기 태조왕 69년]
부여는 전성기 때 인구 8만호에 사방 2천리의 강역을 가진 나라로, 같은 시기 인구 3만호에 불과한 고구려보다 훨씬 큰 나라였다. 특히 한반도는 청동기 유물인 세형동검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부여는 철제무기와 마구, 찰갑 등이 출토돼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상당한 군사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왕에 대한 유일한 단서인 개국신화에는 동명의 출발지로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한다. 즉, [논형 길험 편]에 "그가 탁리국에서 남하해 엄호수를 지나 부여를 세웠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동명성왕이 태어난 탁리국과 그가 망명하여 건넌 엄호수는 어디인가? 그 곳은 북만주 흑룡강성 부유현에서 송화강(엄호수)을 건너 길림까지 약 3천KM를 의미한다. 즉, 지나문헌에서 북이'탁리국'이 바로 흑룡강성지역이며, 망명하여 건넌 엄호수는 송화강임을 알 수 있다.
즉, 원래 부여는 단군한검천황이 한국을 개국하고 아들들에게 다스릴 지역의 나라의 왕으로 삼았는데, 원 부여의 지역이 바로 흑룡강지역으로 무예와 학문이 매우 뛰어 났다는 막내 아들 부여가 왕으로 임명된 지역이고, 지나문헌에서는 이 원 부여를 '탁리국'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탁리국'관련한 지나문헌기록을 보면 부여(탁리국)의 왕이 시녀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인물이 바로 고두막이다. 왕은 고두막을 죽이려 했던 것 같다.그래서 망명하여 47대 고열가 단군천황이 나라의 문을 닫고 산으로 들어가자, 군대를 일으켜 단군조선왕권을 접수하고 개국한 북부여 지역으로 피신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탁리국이라고 기록된 원부여는 당시 해모수 북부여의 제후국의 하나였다고 봐야 한다. [한단고기-북부여]에서 당시 상황과 망명한 고두막에 대해여기록하기를 "계유 원년, 이 해는 북부여 단군 고우루 13년이다...(고두막)은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고두막의 개국신화는 마치 동부여에서 금와왕의 시기질투를 받고 북부여로 망명하여 북부여 단군에 오른 고추모의 신세와 유사하다. 따라서 고구려 고추모의 개국신화는 부여 동명성왕의 개국신화를 차용하여 부여계승 의식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성황 때 국호를 남부여로 칭했으며 사로국, 나아가 대진국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을 부여에서 나왔으며, 동명성왕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부여는 우리 고대 국가 형성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대진국).백제(일본).사로국(신라)의 뿌리 부여
[한단고기-북부여 상]에서 기록하기를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을해 3년 (고두막)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 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오 22년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