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인 듯 합니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한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적으로도 낭비입니다. 그러나, 생계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좋은 직장'의 개념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내 잠재적인 능력을 개발하고, 그러면서도 내 노동의 댓가를 확실하게 지불받을 수 있는 일터야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런 행복한 개개인들이 많으면 사회도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없기에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생기고, 전혀 소용없는 스펙을 쌓아야만 사는 일종의 비극이 생기는 것이죠.
미국에 왔을 때 생존의 전선에서 시간당 5달러씩 받아가면서 비행기 청소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22년을 훌쩍 넘어 23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네요. 미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저소득층에 속하면서도 또 나름 세상을 자기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려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저같은 초기 이민자들이 많았고, 한인이 운영하는 청소 회사였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하는 중간관리자들은 모두 한인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백인들도 많았고, 필리핀 사람들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힘 좋고 체격 좋은 사모아 인들이 그 일터에 고용이 많이 됐었습니다.
페이도 별로 좋지 않았고, 제 자신의 개발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안에서도 일을 재밌게 하시는 분들이 물론 있었고, 그런 분들은 자신의 일을 즐기는 듯한 인상도 받았습니다. 아마 경력도 오래 되었고, 기계를 이용해 청소하고 광 내는 이른바 '헤비 잡'들을 하기 때문에 급여도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주유소의 캐시어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두 직장 다 작고하신 큰아버지께서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분들을 통해 소개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일단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 때문에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 영어로 입을 떼게 해 준 직장이고, 뒤에 가서는 우리 가족이 가게를 열 수 있도록 이런저런 관련된 정보와 하다못해 캐시 레지스터 여닫는 것까지도 모두 배웠으니 제 미국에서의 삶의 어떤 기반이 되어 준 일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우리 식구들이 가게를 열었을 때, 가장 힘든 일은 화장실에 제때 가지 못하는 거였습니다. 손님들은 밀려오고 얼굴이 노래지면, 결국 손님들이 없는 틈을 타서 문을 잠그고 화장실로 뛰는 편법을 배울 때까지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거기에 장시간의 노동은 돈도 좋지만 제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만들었습니다.
명절이면 가족끼리 아침을 먹고 나서 '오늘은 누가 가게를 열지?' 하는 빤한 통밥을 굴리면서 가족들이 서로 견제와 압박을 가하는 것도(?) 참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동생들이 진학과 결혼 등으로 집을 떠나자 남은 식구들의 노동강도는 당연히 강해졌습니다. 결국 부모님의 비즈니스 매각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이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미국에서는 그 자유조차도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하는 상품이었던 것입니다. 비즈니스를 가지고 있었을 때만큼의 경제적 여유는 없었지만, 우리에겐 대신 남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물론 그것은 금전적 압박에서 자유로웠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습니다만.
그 사이에 저는 동포신문의 기자가 됐습니다. 원래 해 보고 싶었던 일을 넘어서, 내 자신에겐 기자가 되는 것이 큰 꿈이었기에 즐겁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결혼을 하고, 현실과 부딪히게 되면서 큰 이상이 내게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절감해야 했습니다. 중간에 일간지에서 일할 때는 그래도 큰 고통이 없었지만 - 아, 편집자와의 갈등이라는 고통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음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 나중에 언론을 하기엔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은 오리건 주로 주간지와 라디오를 만들러 갔던 4년 동안에, 저는 참 많은 성장을 겪었습니다. 기자가 광고 영업까지 해야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여건 속에서 이상을 지키긴 힘들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던 저는 현실과 이상에 양다리를 걸칠 수 있는, 그런 직장은 공무원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고, 특히 경찰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없는 돈을 털어 공부를 시작했고 - 사실은 부모님과 장인어른께서 그때 지원을 안 해 주셨다면 저희 식구들은 숟가락만 빨았을 겁니다- 시애틀에서 학교 다녔던 것이 편입이 인정되어 2년 정도 공부한 끝에 나름 자랑할 만한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나서는 시애틀로 다시 돌아왔는데, 경찰시험을 봤고 합격통보를 받았으며,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순전히 아내 덕에 보게 된 우체국 시험에 합격됐고,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결국 우체국에 입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가을날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내딛었던 그 첫 발이 지금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씩씩한 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제 라우트가 생겼고, 그 안에서 주민들과 애환을 나누고, 시애틀의 한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나름 빠질 수 없는 조그만 아이콘 정도는 된 셈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기도 했고, 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꾸준히 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되돌아보면, 솔직히 급여조건이 좋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체부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일반의 시각이 솔직히 우리나라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도 제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한 원동력이 됐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수습 기간을 마치고 나서 정규 우체부가 되었을 때부터 받았던 복지 혜택들은 미국의 여타 직장에서 받을 수 있는 것들을 뛰어넘는 인센티브였습니다. 매 두 주마다 여섯 시간씩 주어지는 연차, 네 시간씩 주어지는 병가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그 시간이 충분히 쌓이면 매년 최고 6주까지도 쓸 수 있는 유급휴가, 그리고 무엇보다 주어진 시간에 일만 끝내고 나면 그 다음부터 즐길 수 있고 내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내 시간. 제겐 그것이 제일 소중한 것 같습니다.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학교도 다니고... 별 일이 없는 이상은 아침 일곱시 반에 딱 일 시작해서 네 시에 칼퇴근. 학교 가지 않는 날엔 바로 체육관으로 직행해서 운동하고 집에 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부모님 댁에 들러 저녁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자체가 모두 인센티브인 셈이죠.
우체부가 다시 맞은 가을입니다. 늘 이맘때면 바로 이 일을 시작했을 때의 제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우편물을 분류하고 챙겨 나가는 것이 익숙해졌을지언정, 아침 첫 배달의 두근거림은 아직도 여전한 듯 합니다. 오늘은 어떤 날이 될까, 오늘은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길가에서 환히 웃으며 제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마 이게 제가 생각해 오던 이상과 일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 커뮤니티 안에서 그 안의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일. 어쩌면 별것 같지 않아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일을 제가 하고 있는 거라고.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