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이야, 방문 앞에 그 지도교수 놈 얼굴 그려놓고 매일 병원에 나가면서 주먹으로 한번 치고, 들어올 때 욕을 하며 1년차를 마쳤지.”
정신과 수련의를 처음 시작할 때 선배 하나가 이렇게 잔뜩 겁을 주었다.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도 어려운 것이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정신과 의사 노릇이다. 하물며 언어, 풍습, 문화, 생활양식이 다른 나라에서는 말 할 나위도 없다.
간신히 몇 년간의 수련의를 끝내고 진짜 직업 전선에 나오니 이건 수련의 시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 중 누가, 언제, 어디서 사고를 치지 않나 혹시 자살이라도 하지 않았나 하는 긴장 속에서 산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신병 환자가 무슨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 미디어들이 깻묵 덩어리 미끼에 모여드는 송사리 떼같이 달려들어 야단법석을 떤다. 그러니 휴가를 가서도 TV에 귀 기울이고, 신문 사회면과 부고란(欄)을 훑어 보아야 하는 게 정신과 의사의 생활이다.
오랜 기간 동안 해오던 그런 생활을 훌훌 털고 한국에 왔다.그냥 눌러 있을 계획이 아니라 한번 살아볼 까 한다. 물론 자식들과도 소통하고 허락도 받고 왔다. 이곳에 있으면서 가끔은 조용히 눈을 감고 뇌 속에 묻어둔 환자들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보고 싶다.
'흰머리 남자와 주름진 여자'... 써놓고보니 무슨 영화 제목 같으나 실은 내가 가장 오래 치료했던 환자와 나의 이야기다. “Dr. C도 이젠 머리가 희끗 희끗한 게 늙어 보이네요, 나는 어때요?” 어느 날 환자가 웃으며 나한테 던진 말이었다.
그녀를 힐끗 쳐다보니 눈 밑엔 주름살이 많이 생겼고 피부 색깔도 좋지 않았다.그러나 미국에 살며 배운 생활법칙이 생각나서 “쥴리(가명)는 아주 그대로야, 하나도 늙은 것 같지 않은데.”하며 받아 넘겼다.
쥴리는 당시 30대 후반의 결혼한 여자로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나를 처음 정신과 클리닉에서 만났을 때는 고등하교를 갓 졸업하고 조그만 회사에 다니던 예쁜 여자였다. 그 녀는 트럭 운전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는 보통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데 쥴리는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항상 다른 주로 운전하고 다녔고 어머니는 병원 일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바빠 오손 도손 이야기 할 날도 없었다. 오빠 언니들도 자기들끼리 바빠 쥴리를 잘 돌보지 않았고 쥴리가 무슨 말을 물어보면 언니들은 “You stupid”하며 놀려댔다. 가족들은 어찌된 일인지 하나같이 술, 대마초, LSD, PCP등을 즐겼다.
쥴리 생각으로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는 줄 알고 대마초와 PCP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회사에서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기물을 부수고, 옷을 벗어 던지는 난동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되었다. PCP에 의한 정신증상을 나타낸 것 이었다.
PCP는 약 60년 전에 일종의 마취제로 소개되었다.하지만 PCP 마취 후에 깨어난 사람들이 매우 흥분 상태를 유지하고 망상과 비현실적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것을 발견한 뒤 1965년에 사람에게 사용을 금지하고 동물에만 사용을 허가했다. 그러나 시중에서는 PCP를 흥분제로 불법 제조하여 많은 사람들이 남용했다.1960-1970대 가장 인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피움, 코케인에 밀려 자리를 양보한지 오래됐다.
쥴리는 PCP치료를 마치고 직장을 알선해 주는 직업훈련소에 다녔다.거기서 다발성 신경 경화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근무하는 40대의 Social Worker를 만난다. 그리고 아버지뻘 되는 그 남자와 동정심이 깃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고객과 상담사 간의 직장 로맨스는 용납될 수 없어 남자가 직장에서 해고당하자 쥴리는 심한 죄의식과 인간 혐오증으로 다시 병원신세를 졌다. 남자는 쥴리의 입원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쥴리를 방문하여 위로했다.
쥴리는 처음으로 자기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퇴원 후 집으로 가지 않고 남자의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그 때 나이 19세였다. 그로부터 2년간 남자가 죽을 때까지 온 정성을 다해 그를 돌보아 주었다.
그가 죽자 쥴리는 거의 실성하다 시피 되어 히죽 히죽 웃고 다니며 앨비스 프래스리가 죽지 않은 것 같이 그 남자도 어디엔가 살아 있을 거라고 떠들어 댔다. 부득이 쥴리를 또 입원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 입원 중 쥴리는 정신병동에서 지금의 남편 빈센트를 만난다.고아 출신인 빈센트는 알콜 중독과 조울증으로 치료 받고 있었다. 그 둘은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도와가며 살자고 약속한다.
퇴원해서 부모님 께 빈센트와 결혼을 승락 받으려 했으나 “너는 이번에는 병신이 아닌 술주정뱅이와 살려고 하느냐”며 심한 꾸중만 들었다. 자기가 보기엔 아버지, 어머니도 술주정뱅인데 결혼반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빈센트와 결혼하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부모의 반대도 그들의 약속을 어쩌지 못했다.가족도, 음악도, 화환도, 웨딩 드래스도, 리무진도 없이 법정 판사 앞에서의 결혼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대면은 고사하고 전화 한통 없는 부모 자식 사이가 되어버렸다.
외롭게 살면서 남편은 술 중독이 재발되어 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다.쥴리도 가끔 남편과 술 대작하는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쥴리가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갓난아이를 잘 키우고 보살피지 않아 정부기관인 Department of Family Service에 의해 강제로 양육가정에 맡겨졌다.부부는 아들을 뺏긴 후 쥴리는 정신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빈센트는 술 중독으로 술 중독 치료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서너 번 법정에 불려가 쥴리의 정신 상태와 아기 양육능력에 대해 진술해야만 했다. 아들이 7살이 되자 양부모는 쥴리로부터 아들 양육권 박탈 요구 신청서를 냈다. 미국에서 생모의 양육 박탈 결정은 아주 까다롭고 힘든 법 절차의 하나로 여러 사람의 의견이 참조 된다.쥴리를 보면 인간적으로 안 됐지만 잘 크고 잘 교육받는 아들을 위해서는 양부모에게 양육권을 주어야 한다고 증언했다.
나는 그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쥴리의 변호사, 쥴리 아들의 변호사, DCFS(Department of Children and Family Service)변호사,내 변호사의 질문공세에 2시간 동안 진땀을 흘렸다.판사가 양부모의 손을 들어주자 쥴리는 히스테리 발작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그날 쥴리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될 때 나는 왜 하필 이역만리까지 와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나 하는 회의에 빠졌다.
쥴리가 퇴원하면 다른 의사한테 가겠지 했으나 계속 나한테 왔다.남편도 이젠 술을 완전히 끊고 사회보장 연금으로 두 부부가 그런대로 살았다. 법정 사건이 있은 후 거의 십년이 지난 어느 날 쥴리에게 물었다. “아들이 보고 싶지요?” 쥴리는 최근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며 아들의 장래를 위해 아들 앞에 살아생전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거라 했다.
내가 은퇴하기 몇 달 전 쥴리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장가가서 손자를 낳으면 한번 안아보고 싶다며 주름진 눈 사이로 눈물을 보였다. 장장 35년간의 세월을 나와 함께 보낸 이 50대 초반의 가련한 여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천양곡/신경정신과 전문의/일리노이 주립정신병원 Chief Psychiatrist,시카고대학 의대 정신과 임상강사 역임/서울대 의대 졸>